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구성을 두고 1일 여야 간사들이 만나 세부안 논의에 나설 예정이다. 국회에 제출된 국정조사 요구서를 보면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경찰의 축소수사 의혹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의혹 등이 핵심 조사대상이다. 인권침해 의혹이 피의 당사자측이 제기한 피의자 보호 차원의 문제라면, 국정원 대선개입과 경찰의 축소수사가 이 사건의 핵심이다.

나라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이 사건은 태평양이라는 공간과 4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는 기시감(데자뷔)을 불러온다. 1972년 미국 대선에서 중앙정보국(CIA) 요원이 당시 공화당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워터게이트(Watergate) 빌딩 내 민주당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적발돼 이듬해 유죄 판결을 받은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처하는 대통령과 여당의 태도도 유사하다. 당시 닉슨 대통령과 백안관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베트남전 종식 정국을 활용해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자 했으며 사건 자체에 대해서도 국가안보 위협 요소라고 공격했다. 국정원 사건에 대처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자신감도 이에 못지않다. 대선 당시에는 사건 자체가 인권침해일 뿐만 아니라 국가안보 위협 행동이라고 역공했으며, 대선 후에는 NLL 대화록 공개로 물타기를 하며 청와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가 경찰 혹은 검찰의 수사 태도와 의회 및 정부의 대응이다. 73년 당시 조사를 책임진 콕스 특검은 사건을 성역 없이 수사하고자 한 반면, 현재 우리나라 경찰은 이를 무마하고 축소해 왔다. 때문에 콕스 특검은 닉슨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기까지 했지만, 우리 경찰의 축소수사는 의회로 넘어가 여당이 이를 감싸려 하고 있다. 또한 당시 미국 정부에서는 리처드슨 법무장관이 특검 해임에 반대하며 사임했고 법무 차관도 뒤따랐다. 그런데 우리 정부에는 이러한 용기를 가진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미국 정부에서는 “토요일 밤의 학살”로 불릴 정도의 탄압에 굴하지 않는 정의수호 싸움이 있었다면, 현재 우리 정부에서는 불의와의 타협으로 유지되는 평화와 굴종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정의수호 싸움은 의회와 국민의 몫이 됐다. 야당은 의회 내에서 국조특위 구성을 두고 긴 싸움을 하고 있으며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시위를 재개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상·하원을 모두 민주당이 장악한 분점정부 상태여서 닉슨 대통령의 탄핵 결정이 가능했고 이를 인식한 닉슨이 탄핵 결정 이전에 사임함으로써 사건은 종결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닉슨 대통령이 이를 인지했느냐는 것이 아니었다. 사임 후에도 그는 줄곧 억울하다고 주장해 왔으며 그의 인지 여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그의 태도였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여당이 의회 과반수를 장악한 단점정부여서 의회가 여당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은폐를 시도한다는 사건의 본질은 동일하며,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도 다르지 않다. 당시 미국에서 정부 내 분열과 의회 다수당의 힘이 사건 해결에 직접적인 계기가 됐지만, 그 근저에는 민심의 이반이 깔려 있었다. 국정원 사건 해결의 관건도 결국 민심의 향방이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기시감은 ‘감(느낌)’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반복되는 환생적 ‘현실’이 된다. 국정원 사건에서도 민심의 이반이 생겨나고 있지만, 다른 조건들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아직 이반의 힘은 사건을 올바로 해결하기에는 크게 부족하다. 사건이 악화되기 전에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은폐하려는 의도를 버리고 사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과할 뿐만 아니라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한다. 그것만이 워터게이트와 같은 종말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사회의 압력이라는 것이다. 민심의 더 큰 이반이 일어나 충분한 사회적 압력을 행사해야 불행한 환생적 현실을 막을 수 있다.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byungkee@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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