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2003년 3월 CNN의 생중계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민 모두가 컴퓨터 오락게임을 들여다보는 호기심으로 TV 앞에 붙어 앉아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한 악의 화신이 정의의 칼에 무릎 꿇는 장면을 지켜봤다. 아무런 의심도 없다.

두 달 뒤 미국 일리노이에 있는 록포드대학교 졸업식장에서 국제 테러리즘을 탐사보도해 전년도 퓰리처상을 받은 <뉴욕타임스>의 크리스 헤지스 기자가 축하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뉴욕타임스>는 그에게 경고 조치했다.

정확히 10년이 지난 지금 이라크 전쟁의 실체는 전쟁무기를 팔아먹으려던 미국 군수업자들의 농간 이상도 이하도 아님이 드러났다.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헤지스 기자의 비난은 10년이 지난 지금 지극히 정당했다.

헤지스는 졸업식장 연설의 파문에 환멸을 느끼고 뉴욕타임스를 나와 비영리 미디어센터로 자리를 옮겨 일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진보의 몰락>에서 헤지스는 “나는 <뉴욕타임스>에 다닐 때 백만장자들을 위해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 일에 매진했다. 나는 오래도록 내가 거대한 이익집단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말로 머리말을 썼다.

한국의 기자 중엔 이런 생각을 하고 다니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헤지스는 <진보의 몰락>에서 미국 진보 몰락의 역사를 색다른 시각에서 썼다. 헤지스는 “진보가 몰락한 건 레이건이나 부시 같은 우익 정권의 공세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 민주당 세력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최악의 범죄자는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의도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기업에 팔아먹어 왔다. 일자리가 어디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던 빌 클린턴은 1994년 노동자계급을 배신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NAFTA)을 체결했다. 클린턴은 계속해서 복지정책을 축소했고 99년엔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장벽을 허물고 은행을 투기꾼들에게 넘겨버렸다. 버락 오바마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 결과 미국은 전 세계 선진국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전국적 세력을 가지지 못한 나라가 됐다.

가장 먼저 쓰러진 공산주의자와 변혁적 노동운동가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침묵에 치를 떨었다.

언론과 교회·대학·민주당·예술가·노조 등 진보의 기둥들은 권력의 좁은 틈바구니에서 흘러나오는 한 조각의 약속과 기업이 내미는 돈에 팔려 갔다. 20세기 초 노조는 노동자들에게 주말에 쉴 권리와 파업할 권리, 하루 8시간 노동을 선물했다. 그러나 이제 노조에 어떤 기대도 가질 수 없다. 예술계 역시 기업의 돈과 후원에 언론이나 학계만큼이나 굶주려 있다.

지금 미국은 국가 권력보다 더 커진 ‘기업 권력’ 아래에 언론과 어용노조·대학·종교·예술계가 기생하는 꼴로 바뀌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은 원세훈 전 원장의 개인비리와 서울경찰청장 독직사건으로 전락해 의제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다. 대신 대구 여대생 살해사건이 인터넷과 종이신문의 지면을 온통 달구고 있다.

언론은 국가 권력을 위협하는 의제가 출현하기만 하면 이를 소화해 말랑말랑한 주제로 손쉽게 치환시키고, 온라인 투사들의 관음증만 자극하는 기사를 쏟아 낸다. 그럴 재주가 없으면 수백 번도 더 보도했지만 단 한 번도 개선되지 않았던 케케묵은 기획기사로 지면을 채우기 급급하다.

대구 여대생 살해사건에선 초기에 죄 없는 택시기사를 때려잡더니 곧이어 <성범죄 전과자 관리, 감시 여전히 ‘구멍’>(세계일보 5일13면)이란 뻔한 기획물로 지면의 머리를 채우고 있다. 성범죄자 관리와 감시체계가 허술하다는 게 어제오늘 얘긴가. 그래서 쑥스러웠던지 ‘여전히’란 부사어를 제목에 집어넣어 면피하고 있다.

같은날 동아일보의 사회면(10면) 머리기사 <성범죄 온상 ‘클럽 원나이트’ … 인터넷에 성공담 무차별 확산>은 자극적이기만 해 모방범죄만 낳을 뿐 대안도 없다. 심지어 심층보도랍시고 인터넷에 올라온 한 네티즌의 ‘하룻밤 성관계’ 인증 글을 추적해 그의 행선지까지 상세히 소개했다.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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