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희 기자

“그분들(경영진)은 말로는 교보가족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러면서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논의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합니다. 독선적인 가장인 거죠. 그런 가정이 행복할까요. 교보 가족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가장의 입장에서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는 이 가족 말고 다른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기 때문이겠죠. 가부장적인 아버지(교보그룹)에게 칭찬받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일을 그르치고 있다고 봅니다.”

이은순(49·사진) 사무금융노조 교보증권지부장의 말에 가시가 돋쳤다.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교보증권 본점에서 만난 이은순 지부장은 나흘째 서울 여의도 교보증권 본점 로비에서 철야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천막농성의 목적은 점포통폐합 저지였다.

노사갈등은 회사가 지난해 말 WM(Wealth Management)센터로 불리는 자산관리센터를 중심으로 영업(리테일)점포를 통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44개 영업점포를 WM센터 중심으로 통합해 2015년까지 22개로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6월 이사회에서 통폐합 안건을 결정할 예정이다.

회사의 움직임은 벌써 시작됐다. 지난해 말부터 지점을 하나씩 줄이기 시작했다. 현재 남아 있는 지점은 37개다. 올해 4월 노사협의회에서 리테일 직원 사기진작 방안을 논의할 정도로 대화에 적극적이던 회사는 최근 열린 노사협의회에서는 애초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통보했다. 9월까지 서울 강남의 11개 점포를 4개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사측은 점포폐쇄가 아니라 인위적인 구조조정 없는 대형화라고 얘기해요. 과연 그럴까요. 점포를 두세 개씩 묶어 하나로 만들어 직원들을 한 지점으로 몰아넣는 겁니다. 콩나물시루 같은 그런 점포에서 직원들끼리 경쟁하는 시스템이 되는 거죠.”

이 지부장은 성과급제로 드러난 경쟁시스템이 상시적 구조조정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상시적 구조조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실적이 나오지 않는 정규직을 계약직으로 전환한다든지, 실적부진자로 분류돼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스스로 그만두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증권사 영업이 들쭉날쭉하다 보니 우수사원 표창까지 받았던 직원이 계약직으로 바뀌는 등 안전지대가 없다고 한다.

“자산관리영업으로 이제 막 전환한 직원들에게 실적을 압박해서야 되겠습니까. 리테일 영업을 하던 직원들이 자산관리 영업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당장 실적이 안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런데도 못하는 사람을 계속 내보내는 모습을 본 직원들은 어떻겠어요. '내가 견뎌 낼 수 있을까', '이러다가 잘리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게 당연하죠.”

일부 통폐합된 지점에서 벌써부터 그런 기류가 감지되는 모양이다. 이 지부장은 “월 단위, 심지어는 주단위로 실적을 체크한다는 얘기를 듣는다”며 “영업일지나 자아비판 수준의 일지 작성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지부가 자산관리 쪽으로 회사가 방향을 선회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영업점에서 증권 중개업무로 개인투자자들의 투자수수료를 받아 이익을 내던 증권사들의 영업환경이 자본시장통합법 시행과 금융위기로 바뀌고 있고, 수익원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문제는 방법과 속도다. 지부가 경영진에게 보낸 공개질의서에서 표현한 대로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씨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속담이 딱 이 지부장의 생각이다.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리테일 영업점을 폐쇄하면 성장잠재력을 잃기 때문이다. 이 지부장에 따르면 실제로 회사는 점포폐쇄와 신설을 반복했다고 한다.

“전에는 리테일이 회사를 먹여 살렸어요. 어디 리테일 영업이 악화된 게 저희 증권노동자들의 잘못인가요. 회사는 몇 년 동안 리테일에 대한 영업전략이나 추진전략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위축시키는 정책을 폈죠. 거래량이 줄어 수수료 수입이 감소하면 영업방향을 선회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자산관리 교육을 시켜야 하고, 일정한 시간도 필요합니다. 영업 시작한다고 자산이 하루아침에 확 오는 게 아니잖아요. 소통하라니까 ‘리테일에서 죽 쑤고 있으니까 바꿔야 하고 줄여야 한다’는 경영설명회만 했지, 그 안에 어떤 내용을 배치하고 시스템적으로 어떻게 뒷받침할지에 대한 설명은 못하고 있어요.”

이 지부장은 “경영진들이 우리 말을 귀담아듣고 태도변화가 있을 때까지 천막농성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용논리로만 접근해서 성공한 예가 없다”며 “방향을 잡았으면 직원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고 가야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 아니냐”며 대화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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