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승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자

라면 상무·빵 회장·조폭 우유 ….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부당한 ‘갑’의 폭력을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갑의 폭력에 자발적 불매운동·계약해지 등이 일어났고 관계자들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갑의 횡포는 노동자에게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갑의 횡포를 단속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이를 부추기며, 지금도 고공·노숙·단식 농성 등 벼랑 끝에서 저항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일이 발생했다. 방미 기간에 대통령이 직접 ‘사고’를 쳤다.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사건만큼이나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지난해 3월 금아리무진에 대한 대법원 판결 뒤 통상임금 범위 확대를 요구하는 소송이 줄을 이었다. 제조업 대공장 중에는 한국지엠의 소송이 가장 빠르다. 법원은 1·2심에서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 범위에 포함된다”며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고, 현재 대법원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니얼 애커슨 지엠 회장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면 한국에 5년간 8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사법부에 압력을 넣어 달라는 로비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한술 더 떠 “최대한 합리적 해법을 찾아 보겠다”고 답했다. 청탁을 수락한 것이다. 재계 추산 38조5천억원이 걸려 있고, 5인 이상 모든 노동자에게 영향을 주는 엄청난 내용을 ‘80억달러’에 거래한 셈이다. 게다가 청와대는 이것을 방미 성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지엠은 올해 2월 이미 80억달러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법원 판결 무시하는 정부

지엠 회장이 미국에서 통상임금에 정기상여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한국지엠이 지속적인 흑자를 기록하는 해외법인이라는 것도 잘 알 것이다. 지엠 회장이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한국정부에 투자를 조건으로 통상임금 축소를 제기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근간을 흔들며 노동자를 무시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이는 통상임금뿐 아니라 창원공장 불법파견 문제도 침묵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한국정부는 투자만 하면 노동자가 어떻게 되든 자본을 위한 합리적 해법을 찾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갑의 폭력이 확대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인가. 불법파견·산업재해(불산 누출과 발암물질 등)·내부거래·지분승계와 같은 부당행위로 지탄을 받고 있는 삼성그룹·현대기아차그룹 등 재벌들이 앞다퉈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법적 책임을 ‘당당히’ 회피하고 있다. 정부는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다.

‘합리적 해법’은 사회적 기준 지키는 것

현대차 불법파견 집단소송은 선고를 앞두고 파견법 6조3항(고용의제) 관련 헌법소원 결과 뒤로 느닷없이 연기됐다.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사무지회의 통상임금 소송 선고도 대통령 발언 뒤 별다른 이유 없이 연기됐다. 사법부가 벌써부터 행정부와 재계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정부다. 법원이 법 해석을 하면 행정지침을 바꾸고 현장지도를 해야 할 정부는 유독 노동자에게 유리한 판결 앞에선 직무유기가 습관화됐다. 불법파견·사용자 범위 확대·휴일연장근로 인정 등 노동자 손을 들어준 대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노동부는 늑장만 피웠다. 통상임금도 역시나 방치됐다. 이런 상황에서 방미 뒤 갑자기 통상임금 협의를 위한 노사정 대화를 얘기한다. 이미 법원의 판단이 끝난 사안에 대해 무슨 협의가 필요한가. 참 이해할 수 없다.

비판기능을 상실한 언론은 더 심하다. 3년 동안 통상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고 떼먹은 재계를 향해 38조5천억원을 지급하라고 요구하지는 못할망정 경제발전을 위해 합리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이지 못한 언론의 태도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법정 노동시간인 주 40시간을 일하고, 주말에 쉬었을 뿐인데 ‘7만9천대 생산차질, 1조6천억원 생산손실’이 생긴다고 난리법석이다. 노동자가 법을 어겨 가며 장시간 노동을 하면 ‘귀족노동자’가 되고, 노동시간을 준수하고 임금의 25%나 되는 특근수당을 포기하면 중소기업 노동자를 다 죽이는 ‘배부른 돼지’라고 비난한다.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저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특근을 하지 못해 중소기업이 어려운 것은 단가를 후려치는 불합리한 하도급계약 탓이다. 노동시간단축을 했음에도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투자를 하지 않는 기업 책임이다.

정부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사회적 기준’을 불합리한 것으로 매도하고 있다. 법원 판결을 무시한 채 불법 기업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합리적 조치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무엇이 합리적이라는 말인가.

“5월1·8·9일 휴일을 없앨까요? 합리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열심히 일을 하기 위해 쉬는 게 나쁘지 않죠.”

프랑스에서 쉬는 날이 많다며 휴일 축소를 주장하는 재계를 겨냥해 사팽 프랑스 노동부장관이 한 말이다. ‘합리적’이란 단어는 사회적 상식을 말할 때 표현하는 것이다. 정부·언론·기업은 아무 때나 ‘합리적’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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