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장

미국 방문길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일 첨예한 노사갈등을 빚고 있는 ‘상여금도 통상임금’문제에 대해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고 한국경제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다. 꼭 풀어 나가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대니얼 애커슨 지엠 회장의 “한국에 8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하려면 통상임금 문제를 한국정부가 나서서 해결해 줬으면 한다”는 발언에 대한 응답이었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도“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기업에서도 통상임금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며 “법 개정도 필요하지만 노사정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공론화시켜 노사가 큰 틀에서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드디어 노사정위원회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노사관계 현안의 블랙홀'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노사정위로 통상임금 문제를 떠넘기겠다는 것인가.

외자유치를 위해 우호적인 투자분위기를 설명하는 한국정부의 입장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 기업 투자지침의 핵심은 투자유치국의 '법령 및 관행 존중과 준수'가 핵심인데,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한 GM 회장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재판부의 판단에 영향을 주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 이야기가 떠도는 것을 보면 우려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그동안 전향적인 판결과 사법부의 독립성 제고로 국민의 신뢰를 높여 가던 사법부의 양식을 믿고 싶다.

통상임금 제도는 근로기준법이 제정될 때부터 도입됐으나 개념 및 체계에 대해서는 법적근거가 없이 시행령에 추상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근로기준법 시행령은 모법의 위임 없이 통상임금을 '근로자에게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소정근로 또는 총 근로에 대하여 지급하기로 정한 시간급 금액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통상임금은 각종 수당(해고예고수당·유급휴일수당, 연장·야간 및 휴일가산임금, 연차휴가수당, 출산전후휴가수당 등)의 산정기초가 된다.

노동부는 그간 ‘통상임금 산정지침’으로 통상임금을 협소하게 해석해 적용하고 있으나 사법부가 지속적으로 통상임금 구성요소를 재해석해 그 범위를 확대시켜 온 것이 그간의 사정이다.

노동부의 요지부동은 대법원 판결 등이 판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다. 그러나 그런 주장의 허점은 기간제법상 차별금지와 관련해 "기간의 정함이 있는 노동자가 반복적으로 계약을 갱신할 경우 갱신기대권이 형성되고 이런 논리에 따라 합리적 이유가 없는 계약 갱신 거부는 해고"라는 기존 법리에 대한 거부, '임금이 계속되는 차별인지 여부'에 대한 노동부 해석에 대한 법원의 거부 등에 대한 신속한 수용과는 크게 대비된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통상임금 판결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사회적 파장이 크다는 것일 뿐, 통상임금 관련 판례가 오히려 더욱 일관되기 때문에 노동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간 대법원의 판례를 일별하면 90년 12월 통상임금의 개념을 최초로 정리해 정기적·일률적으로 임금산정기간마다 모든 노동자에 대해 나오는 고정급을 통상임금으로 규정했고, 94년 5월에는 '일률성' 개념을 확대해 육아수당처럼 모든 노동자가 아니어도 고정적인 조건에 해당하는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금품은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했다. 96년 2월에는 '정기성' 개념을 확대해 명절귀향비처럼 임금지급 기간이 아니어도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금품은 통상임금에 포함시켰고, 역시 같은해 2월에는 식대비·체력단련비·개인연금 지원금도 고정적으로 나오면 통상임금에 포함했다. 지난해 3월에는 정기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각종 수당 및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결은, 통상임금을 산정기초로 하는 연장·야간·휴일노동에 대한 가산임금에 대해 지난 3년간 지급되지 않은 임금은 ‘체불임금’이며 향후 발생한 임금 역시 법적으로 지급해야 함을 명확히 한 것이다. 물론 개별 당사자의 소송 끝에 확정되는 것이지만 적어도 노동자들은 잠재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통상임금 개념의 불명확성은 노사 간 소송과 교섭에서의 갈등, 노사관계 악화 등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초래하는 최대 요인 중 하나다. 이를 최소화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는 노동부가 (기업들이 미지급의 근거로 핑계를 대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가장 규정력 있는) 통상임금 산정지침과 대통령령을 바꾸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국회가 나서 대법원의 판례를 수용해 입법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계의 줄기찬 주장에 대해 입법부와 행정부는 '유해화학물질 관리법'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기업의 어려운 민원을 앞장서서 해결한다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최근 통상임금 논란은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에 비유컨대, 30여년된 노후설비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엄청난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국민여론에도 법안을 대폭 후퇴시키면서 직무를 유기한 '마이동풍 입법부와 행정부'에 대한 사법부의 경고이자 최후 견제장치가 바로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합리적인 해법 또는 노사정 대타협'을 운위하는 것은 사법부의 판단을 무시하고 '노동자들이 이미 확보된 권리'로 생각하고 있는 임금문제를 무원칙하게 정치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통상임금 문제의 본질은 대법원 판결로 임금이 추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당연히 지급했어야 할 임금을 대법원이 확인시켜 줬다는 데 있다. 즉 한국지엠을 비롯한 60여개 노조가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이유는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결에 따른 것으로 그동안 사용자들이 부당하게 지급하지 않은 임금을 제대로 돌려받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용자가 (혹은 일부 노동조합이 공모해) 임금산정의 기초가 되는 통상임금을 줄이기 위해 노동부의 행정지침상 통상임금에서 제외되는 각종 수당 및 상여금 등을 편법적으로 지급하면서 임금체계를 왜곡시킨 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현재와 같이 통상임금의 개념과 범위가 불명확하고 추상적인 상황에서 판례법리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입법적 개선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몇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최소한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고 노동자들에게 이미 부여된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둘째,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최소화하고, 노사관계를 발전시키는 방향에서 추진해야 한다. 수많은 노동자와 노조가 노사관계 악화를 우려해 적극적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장시간 노동체제를 타파하고, 임금체계를 기본급 혹은 본봉 중심체계로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아울러 임금개념, 즉 평균임금·통상임금·정액임금 등 임금과 관련한 개념을 단순·명료화하는 방향에서 진행돼야 할 것이다. 끝으로 과거와 현재 및 노사정 간 손익의 균형 아래 미래지향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사법부의 통상임금 판례를 존중하는 것은 현재 '고용률 70%'라는 국정 최대 목표 달성과 장시간 노동체제를 해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다. 근로기준법은 연장·휴일근로시 별도 수당을 지급하도록 하는 등 법정 노동시간을 준수하도록 임금으로 강제하고 있는데, 노동부의 행정해석처럼 통상임금의 범위를 축소시켜 적용하는 것은 이러한 입법취지를 퇴색시킬 우려가 있다. 또한 기존 장시간 노동체제는 사실상 낮은 임금에 기인해 기존의 노동력만을 활용하려는 (노사관계에서 주도성을 가지고 있는) 사용자의 편의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통상임금 현실화는 이러한 관행을 개선하는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그동안 통상임금에서 배제돼 오던 정기적·일률적·고정적 각종 수당과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되면, 통상시급이 그만큼 올라가 야간·연장·휴일근로 등에 대해 지급해야 할 가산임금이 50% 할증에 따라 대폭 인상되게 된다. 이것이 생산성 향상과 연계될 경우 신규인원을 채용하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