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영
부천지역노조
위원장
(전 한국노총
부천지부 의장)

“더 이상 당위적 이야기만으로 노동자에게 통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국노총 통일선봉대에서 밤늦도록 “통일선봉대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조직할 수 있을까”를 토론하며 나눴던 이야기다.

분단체제 유지와 국방비 소요비용이 통일비용보다 많다, 국방비만 줄여도 우리 노동자들에게 다양한 복지를 제공하고 우리 노동자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 통일이 되면 북한의 자원과 남한의 자본의 결합으로 비약적 경제성장도 가능하다,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는 동북아 중심국가로 성장해서 우리 노동자의 삶도 바꿔 놓을 것이다, 등의 분석은 더 이상 우리 노동자의 귀에 쏙 들어오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노총에서 통일선봉대를 꾸리기가 만만치 않은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이다.

지난 대선 시기 대형파이프를 생산하는 회사의 한 노조간부는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정권이 바뀌고 나면 남북관계가 호전되고 시베리아까지 송유관이라도 놓이게 되면 우리 회사는 대박 난다거나, 3년간 임금을 못 올렸는데 남북관계가 호전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현장을 다니며 교육하면서 만난 무수한 노조간부들 중 남북관계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한 분의 이야기다.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를 통해 남북관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권이 교체되면 설마 지금보다 남북관계가 나빠지기야 하겠어, 라는 막연한 기대는 사정없이 무너졌다.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미국 주도의 안보리 제재·북의 핵실험·키리졸브 훈련·북의 정전협정 폐기 선언·개성공단 출입 통제로 이어지면서 정권교체 후 남북관계는 그 끝을 행해 달리고 있다.

조심스럽게 대화 가능성을 점치는 주장도 있지만 북한에 대한 이해 정도의 차이에서 그 해법은 분분하고 주장이 갈린다. 그러나 공멸을 향해 달려가는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외국에 있는 지인들이 페이스북을 통해 전하는 소식을 보면 위기의 중심에 서 있는 우리들보다 현재의 북미와 남북 대치상황을 더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

주식시장에서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고 있어도, 우리 노동자와 서민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예전 같으면 마트에서 라면과 생수가 동이 났다, 뭐 이런 소식이 나올 법도 한 위기 상황인데도 동요하지 않는다.

“걱정 안 돼?”라고 물으면 “전쟁이 나겠어요?”라고 별 고민 없이 이야기를 다시 던진다. 아니면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 거 신경 쓸 여유가 없나 보죠”라는 답변이 대부분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귀국이 안도감을 준 것일까. 아니면 긴장의 지속이 만들어 낸 단련쯤으로 이해해야 할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이라는 연속극의 이야기처럼 노동자들은 당장 자신들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는 것이 보다 근접한 답변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바쁜 노동자들에게 전쟁 위협을 걱정하는 것은 이제 사치가 돼 버렸다.

그러나 (이 문제는) 먹고사는 것과 직결될 수 있기에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이 있다. 남북관계에서 긴장이 지속된다면 노동자 분신소식도 대한문 농성장도 언론에서 묻혀 버릴 것이고 극우보수들의 직접적 타깃이 될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의 공안정국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물리적 압력보다 분위기 압도라는 더 큰 압력이 우리 노동자들의 기를 죽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정당한 목소리는 배부른 소리, 심지어 북한을 이롭게 하는 소리로 매도될 수 있다. 다시 87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걱정을 해야 한다.

전쟁위기에 둔감한 것처럼 이런 공안정국에도 둔감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노동자의 주장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보다 이명박 정권에서 쟁의건수가 줄었다. 왜일까. 여러 이유를 나열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시쳇말로 “쫄아서”다. 우리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당한 주장을 뒤로하고 다시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올 수도 있다. 전쟁 발발은 말할 것도 없고, 긴장관계 지속만으로도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걱정 뒤에 이런 꿈도 꿔 본다. 미국 농구선수 로드먼이 북한에서 친선경기를 하는 것보다 남북노동자 친선축구 경기가 더 의미 있는 행사였으면 좋겠다.

그 어떤 남북경색 국면에서도 남북노동자의 힘으로 꼭 성사시키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경기가 됐으면 하는 꿈을 꿔 본다. 축구경기가 가져다줄 더 나은 삶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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