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
전태일을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대표

교역은 평화를 가져오는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교역(trade)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주장을 하면서 전쟁을 막기 위해 교역 확대를 그 방책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이른바 ‘자유주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런 이론의 대부가 칸트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으로 유명한데, 그는 이런 주장을 펼친다. “상업과 교역은 서로 사귀고 소통하려는 인간의 본성이 창출”해 낸 것으로서, 이런 “상업정신”은 전쟁과 양립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상업의 발전과 교역의 확대는 교역하는 두 나라에 모두 이익이 되며, 이런 화폐의 힘이-도덕적 힘이 아니라-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자유주의 이론을 한반도 평화 문제와 남북 간 평화 문제에 적용하고자 한다. 이른바 햇볕정책이다. 군사력으로 전쟁 억지력을 높이는 것보다 남북 간에 경제적 교류를 증대시키는 것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상업과 교역을 자본주의와 분리시켜 추상적으로 고찰하는 데 맹점이 있다. 근대 이전 시대에는 상업과 교역이 서로 간의 친선과 평화를 뜻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중국과 주변 나라들 사이의 조공무역이 그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업과 교역은 애초부터, 그리고 날이 갈수록 친선이나 평화에 반(反)해 왔다.

자본주의·제국주의는 전쟁과 친하다

자본주의가 막 탄생하던 중상주의 시대에 교역은 곧 전쟁이었다. 스페인·네덜란드·영국·프랑스의 중상주의는 곧 해적질과 약탈전쟁을 뜻했다. 그 유명한 동인도회사들은 원거리 교역을 하는 무역회사인 동시에 전쟁으로 약탈하는 회사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들의 인도와 인도네시아 약탈이다.

자유무역 시대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동인도회사가 폐지된 19세기 대영제국의 자유무역 황금기에 영국은 중국을 향해 여러 차례 전쟁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편전쟁이다. 중국에서 차를 사 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은이 필요했고, 그 은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다 아편을 퍼뜨리고 팔고자 했으며, 중국 정부가 이에 대해 규제를 하자 영국은 중국의 수도로 쳐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니 교역이 곧 평화라는 말은 아시아 민중들의 경험과 전혀 일치하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접어든 독점자본주의 단계, 제국주의 단계에 이르면 교역과 평화는 더욱 멀어진다. 우리나라는 19세기 중후반부터 여러 차례 양요(洋擾)에 시달렸다. 병인양요·신미양요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구미 제국주의 나라들에게 교역을 허(許)하라고 강요하는 무력행사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결국 일본 제국주의를 필두로 구미 제국주의 나라들에게 개항을 허락했는데, 그 결과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의병전쟁 등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제국주의는 지구상에 수많은 식민지 쟁탈전쟁을 벌였고 서로 간에 패권쟁탈전을 벌였다. 이런 패권쟁탈전을 대표하는 것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세계대전을 벌이던 당시 제국주의 나라들 간에 교역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교역이 아주 활발히 이뤄져 세계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주 단순화시켜 말하면, 세계대전은 나라 간 상업과 교역이 없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상업과 교역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물론 교역 그 자체 때문이 아니고 그 교역이 자본주의적 교역, 제국주의적 교역이었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전쟁과 노동자는 상극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쟁은 땀 흘려 일하는 민중에게는 재앙이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의 전쟁 시대는 민중들에게는 다름 아닌 참화의 시대였다. 한나라 말기에 민중들은 도탄에 빠져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지만 유비는 이 황건적을 무찌르는 전쟁으로 영웅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 영웅들의 권력쟁탈전에 민중들은 인적으로 병력으로 동원되고 물적으로 전쟁물자를 수탈당한다. 그런데도 글로 쓰인 역사, 왕후장상의 역사는 하나같이 이 전쟁들을 멋진 이야기로 미화하기만 해 왔다.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선 뒤에도 전쟁이 노동자에게 재앙인 것은 다르지 않다. 아직 독점자본주의에 이르기 이전의 산업자본주의 단계에 이미 노동자들은 민족국가를 가로질러 단결했다. 그것이 제1인터내셔널이다. 제1인터내셔널은 프랑스와 독일이 벌인 보불전쟁을 자본주의 나라들 간의 전쟁이면서 프랑스 나폴레옹 왕조와 독일 프러시아 왕조 간의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나폴레옹 3세의 독일 침략전쟁과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러시아의 프랑스 침략전쟁을 모두 반대했다. 그들 간의 전쟁에 동원돼 우리끼리 피 흘리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뜻이었다.

자본주의가 독점단계에 들어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노동자 조직은 제2인터내셔널인데, 제2인터내셔널은 8시간 노동제 쟁취와 더불어 전쟁 반대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활동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은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노동자 국제주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각기 자기나라 자본을 위해 노동자끼리 서로 싸우는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런 중대한 과오로 인해 이 노동자 조직은 노동운동의 오명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이런 잘못된 길로 인도한 세력이 바로 개량주의 노동관료들이었다. 이런 배반을 비판하면서 러시아에서는 제국주의·자본주의 간 전쟁에 반대하고 그 전쟁을 오히려 세상을 바꾸는 기회로 삼자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에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노동자 세상이 됐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은 사라졌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였다.

노동자가 전쟁에 반대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때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은 전형적으로 제국주의 상호 간의 전쟁이었다. 식민지를 서로 차지하려는 데서 촉발됐다. 그러므로 제3인터내셔널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전쟁에 일관되게 반대했고 전쟁 반대와 제국주의 반대, 민족해방 지지를 긴밀히 결부시켰다. 또한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돼 후발 자본주의·제국주의 나라들에서 파시즘이 대두되고 이들이 전쟁의 도발자로 나타나자 전쟁 반대와 파시즘 반대, 민주주의 지지를 긴밀하게 결부시켜 추진했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나서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전쟁 반대도 끝날 수 없었다. 미 제국주의가 베트남을 신식민지로 지배하고자 침략전쟁을 획책했을 때 세계 노동자들은 그에 반대해서 제국주의가 패배하게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그랬다.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라크와 후세인을 그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서 노동자와 민중은 이라크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진보적 노동조합인 국제항만창고노조(ILWU)는 이라크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의사표시로 1일 총파업을 실시했다. 이라크 항만노조와 함께. 이것은 필자가 2009년 그 노조의 초청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알게 된 이야기다.

아직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반전투쟁도 계속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노동자와 전쟁은 태생적으로 상극이므로.

교역을 늘릴 게 아니라 세상을 바꿔야

지금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이른바 2008년 미국발 금융공황 이래 대불황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대불황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안으로는 재정적자를 누적시키면서 군수소비를 증가시켜 불황이 더 깊어지는 것을 막는 데서, 자본의 이윤보장을 위해 노동계급에 대한 파시즘적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는 데서 구하고 있다. 밖으로는 약소국을 재식민지화해 자원을 수탈하고 시장을 독점하는 데서, 그리고 제국주의·자본주의 강대국들 상호 간에 패권쟁탈전에서 승리해 세계시장을 지배하는 데서 구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지속되기 위해 자본주의·제국주의에게는 전쟁이 필수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이로 인해 지구촌 전체에 지금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특히 석유가 많이 나는 중동 지역과 강대국들의 국경이 인접해 있는 동북아 지역에서 그렇다.

지난 두 달간 한반도를 휩쌌던 전쟁위기도 이런 세계현실 및 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아니 그것과 밀접하게 결합돼 있다. 그러므로 이 전쟁위기, 그 가운데 이 땅 노동자·민중의 직접적인 관심사인 한반도 전쟁위기는 세계현실이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노동자들은 세계적으로나 남한 일국적으로나 생존권을 사수하는 투쟁과 더불어 생명권을 사수하는 투쟁,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에 동참하고 떨쳐나서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러한 전쟁 반대 투쟁을 세상을 바꾸는 투쟁과 긴밀하게 결부시켜 추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실패한 제2인터내셔널의 관료·개량주의 노동운동처럼 자기 자신을 전쟁의 희생물로 바치게 된다. 그때 그 동안 획득한 기득권은 물론이고 생존권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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