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주
경제민주화
2030연대 대표

아침저녁으로 겨울날씨가 채 가시기 전이지만 미리 봄옷을 장만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중저가 의류를 대량으로 판매한다는 대형의류매장을 찾았다. 유명 여배우가 실제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신기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대형사진이 걸려 있는 넓고 깨끗한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 대부분은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천천히 매장을 돌아다니며 옷을 골라 보고 걸쳐 보는 와중에 바쁘게 매장을 돌아다니는 직원들이 다가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너무나도 세심하게 도와준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잠깐 봤을 뿐인데 내가 스스로 옷걸이에 옷을 다시 걸려고 해도 굳이 직원들이 일일이 일을 처리한다. 이쯤 되면 세계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의류매장의 친절한 서비스에 감동받을 만도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왠지 불편해진다.

매장 스피커에서 갑자기 오늘 하루 즐거운 쇼핑이 되길 기원한다는 방송멘트가 흘러나오자 매장 전체에 있는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큰소리로 그 멘트를 따라하며 옆에 있는 고객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크고 환한 미소를 짓는 순간 그 불편함은 극에 달했다. 그것은 강요된 친절이고, 굳이 내가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친절이다.

최근 엄청나게 발전한 서비스산업에서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감정노동을 하는 새로운 서비스산업 노동자들을 마주하게 된다. 여성이거나 청년,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무조건 환한 미소와 세심하고 따뜻한 서비스를 제공할 어떤 의무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대형의류매장만이 아니다. 혹여 지방에 갈 일이 있어 기차를 타면 여승무원들이 짓는 과도하다고 느껴지는 커다란 미소와 깍듯한 배꼽인사를 볼 수 있다. 유명한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피자집에 가면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청년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을 내려다보며 주문을 하고 깍듯한 배꼽인사를 받아야 하는 나는 도대체 무슨 이유와 근거로 그렇게 융숭하면서도 타인의 인격을 갉아먹는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문득 직원들에게 반말과 욕설을 날리며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소위 ‘진상손님’과 나는 무엇이 크게 다른지 의문이 든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며 합리화의 달인인 한편 관습의 노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한 듯이 받는 강요된 친절 속에서 스스로 의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노동하는 누군가에게 ‘진상’이 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는 서비스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청년들에게 손님들에 대한 ‘친절’이 아니라 ‘복종’을 강요하고 있다.

사실 기성세대는 이미 수십 년에 걸친 소비경험에서 서비스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더라도 그들이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진상손님이 기성세대에서 많이 나타나는 배경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거의 동세대라 할 수 있는 청년세대에서도 높아진 권리의식(?) 때문인지 마치 자신이 지불하는 각종 비용에 그런 친절을 넘어선 어떤 대우를 받을 권리가 포함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제법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노동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도 타인의 인간성을 해할 권리는 비용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수백 년 전 노예노동이 폐지되면서 없어진 것이고, 인간이 ‘야만’이라는 이름을 포기하려 하면서 사라져 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친절한 고객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우리를 다시 야만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몇 년 전 개봉했던 한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사실 이 대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민초들을 무시하고 짓밟거나 갑이 을을 괴롭힐 때 사용하는 아주 나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서비스 노동자들에게 때로 ‘슈퍼 갑’ 고객이 되는 우리 스스로가 야만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역설적으로 적용해 볼 필요도 있다. ‘호의’는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의 인격을 해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대우받는 고객이기보다 친절한 손님이고 싶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부드러운 말투와 희미한 미소면 충분하다. 그 이상을 받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오늘도 나는 몰래 그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저에게 너무 친절하게 대하지 마세요."

경제민주화2030연대 대표 (haruka28@hanmail.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