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복
공인노무사
민주노총 인천본부 노동상담소

2004년 콜트악기에서 해고된 노동자 사건을 맡았다. 목과 어깨 통증이 심했지만 오랜 기간 참고 일했던 한 노동자가 심리적 우울감에 빠져 일주일 가량 무단결근을 한 사건이었다. 결국 부당해고로 판정돼 복직으로 마무리됐다.

이 과정에서 당시 금속노조 콜트악기지회 A지회장을 알게 됐다. A지회장은 그해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고 새 지회장은 해고된 그 노동자를 위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반면에 A지회장은 해고된 그를 위해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났고 결국 초짜 노무사였던 나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2007년 콜트악기는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당시 지회는 대책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A지회장은 (해고노동자 사건 이후) ‘무식한 믿음으로’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그렇게 대책위에 결합하게 됐다.

사측은 누구를 해고할지 노조와 협의하자고 통보했고 노조는 단체교섭으로 풀자고 맞섰다. 그런데 대한민국 법은 사용자가 경영을 잘못해 회사가 어려워지면 노동자들을 해고해서 회사를 살린다는 정리해고를 노사가 협의만 하면 된다고 한다. 더구나 법원은 그 협의조차도 반드시 거쳐야 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렇기에 (단체교섭으로 풀자는) 노조의 주장은 법적으로 모두 틀렸다. 하지만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요구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사측은 정리해고 절차를 밟아 갔다. 협의하자고 통보하고 해고기준을 정해 통보하고 결국 해고 30일 전 해고 대상자들에게 정리해고를 예고하는 통보를 했다.

콜트악기는 2008년 9월 공장 문을 걸어 잠갔다. 굳이 폐업했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정말로 폐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류상으로도 말이다. 2007년 정리해고의 경우 노동위원회 초심과 재심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사측은 이후 불복하고 행정법원과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마침내 2012년 2월, 5년 만에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사측은 복직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해고자들은 별도로 민사소송을 진행했다.

그런데 민사 2심(고등법원)에서는 사측이 2008년 9월 공장 문을 걸어 잠근 것을 두고 사업이 폐지된 것으로 판결했다. 대법원도 같은 판결이었다. 법인과 사업자등록, 그들이 사용하는 콜트악기 상표권이 모두 살아 있는데,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콜트악기라는 브랜드의 기타가 팔려 나가고 있었다. 법원의 입장은 단순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사업 폐지가 아님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증명하지 못했으니 행정법원의 부당해고 판결(복직명령)은 2008년 8월까지라는 것이다. 그런 판결을 2012년 가을에 했다. 이미 4년 전에 콜트악기라는 회사도 노동자도 모두 없어졌다는 것 아닌가.

또한 콜트악기는 2012년 2월 행정법원 소송이 대법원에서 부당해고로 확정되자 곧바로 해고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2차 해고를 한 것이다. 복직이 없었는데 또다시 해고라니. 더구나 그 2차 해고를 받아든 상태에서 노동자들은 민사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그 2차 해고에 대해 구제신청을 하자 지방노동위원회는 구제신청 자격이 없다며 각하했다. 해고자들이 궁지에 몰린 것이다.

사측은 정리해고 관련 법적 분쟁에서 질 때마다 서류를 바꿨다. 처음엔 무데뽀로 밀어붙였지만 거대 로펌으로 대리인을 바꾼 다음부터 서류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후엔 법인등기에서 사업목적을 바꿨다. 기타제조업을 지운 것이다. 그런 다음 공장 땅과 건물을 팔았다. 그 부동산 잔금이 치러지는 날 콜트악기가 석면철거계획서를 제출했다. 공장 부동산이 팔렸는데 왜 콜트악기가 팔린 건물의 철거계획을 신청할까. 나의 사회통념상 매우 의심 가는 부분이지만 오로지 정리해고를 관철시키려고 요식행위를 밟아 가는 게 순서상 분명해 보였지만 이런 의심은 벽에 막혀 메아리로만 돌아오는 듯하다.

필자는 2012년 6월부터 민주노총 인천본부 노동상담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콜트악기가 인연이 돼 얻게 된 직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인연으로 새 직장에 적응하던 중 올해 2월4일 오전 정리해고 투쟁농성을 벌이던 콜트악기 공장으로 행정대집행을 실행하러 용역들이 들이닥쳤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들려 나왔다. 비 오는 금요일이었다. 거기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허리 아프다는 사람, 팔이 삐었다는 사람, 그리고 감기 걸린 사람이 수두룩했다. 다음날인 5일 오후 콜트악기 투쟁에 연대하는 노조들과 지역단체들이 공장 문을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A지회장을 비롯해 몇몇이 공장 안에 진을 쳤다. 경찰병력을 뚫은 것이다. 하지만 6일 경찰은 공장 울타리 바깥으로 펜스를 쳤고 7일 경력을 증원했다. 그날 새벽 공장 안에 있던 A지회장은 다시 실려 나왔다.

이 6년짜리 힘들고 지루한 싸움에는 많은 사연과 갈등과 애증과 논리가 있다. 노동자들은 그 모든 걸 뒤로하고 공장을 빼앗겼다. 어느새 대부분 50~60대를 넘겨 버린 해고자들은 지금도 공장 앞에서 천막농성을 이어 가고 있다. 부도덕한 자본과 그 부도덕함을 편들어 준 대한민국이 이 투쟁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