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 법률원)

옛 군사독재 시절 민주를 논하고, 진보를 말하고, 노동을 말하면 ‘빨갱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들어야 했다. 반독재·노동조합·노동운동, 이 모든 것의 가치는 빨갱이라는 한마디에 위축돼야 했고 근거 없는 비방과 타도의 대상이 돼야 했다.

문민정부·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제 민주주의를 말하고 노동을 말하는 사람과 단체들에 빨갱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은 더 이상 만연해 있지 않은 듯하다. 대신 이제 조금만 진보적이고 친노동적인 단체들과 사람들에게는 ‘종북’이라는 비방이 가해지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보면 민주노총·전교조·서울시장 박원순·성남시장 이재명도 종북이다. 이런 광범위한 종북 운운에, 급기야는 한 배우가 지난해 대선 직전 안철수 후보의 사퇴에 대해 “난 이래서 종북자 무리들이 싫다”며 대한민국 제1 야당인 민주통합당을 종북자 무리로 보는 듯한 기가 찬 발언까지 하는 실정이 됐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만연한 종북 운운에 따르면 “나는 보수요”라고 공언하는 사람과 단체들 이외에는 전부 종북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진보·노동조합·노동운동 세력에게는 과거 빨갱이 운운과 같이 운신의 폭을 좁히고 낙인찍으려는 눈들에 의해 조직·활동이 위축될 수 있는 ‘만능 무기’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평화통일을 염원하면서 북한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의 제목을 학생들에게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전교조는 종북으로 매도되고, 일제고사가 학생들 간의 경쟁을 심화하고 서열화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일제고사 반대를 주장하거나 무상급식을 주장해도 전교조는 종북으로 왜곡되고 비난을 받아야 했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해 보수단체들이 전교조 선생님들이 근무하는 학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전교조를 종북집단·이적단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명예훼손 내지 인격권 침해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고, 이달 21일 서울고등법원은 원심 판결이 타당하다는 내용의 판결을 했다.

또한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보수단체가 전교조 선생님들에게 “일부 종북세력이 전교조를 이끌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한 것에 대해 전교조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불법행위가 성립된다고 판결했고, 최근 서울중앙지법 항소부는 같은 내용으로 판단했다.

위 판결의 주요 판단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사회에서 단체나 개인이 (북한을 추종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종북세력으로 인식되는 경우 그 단체나 개인의 주장이나 견해, 지향하는 정책 등에 대한 구체적인 확인이나 검증을 불문하고 국가적·사회적으로 위험한 존재로 각인될 가능성이 높고, 위와 같이 북한을 추종하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 현행 국가보안법에서 중한 법정형을 규정해 엄한 처벌이 이뤄지는 실정인 점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의미의 종북세력이 아닌 개인이나 단체가 종북세력으로 지칭되는 경우 그 개인이나 단체에 주어진 사회적인 평가가 객관적으로 침해된다고 봄이 상당하다. 결국 위와 같은 표현은 알권리나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 봄이 상당하다.”

법원은 ‘표현의 자유’의 가치를 중요하다고 판단했지만, 근거 없이 자신의 의견과 다른 세력을 종북집단으로 비방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일탈해 다른 세력의 사회적 활동을 위축시키고 수사의 대상이 될 위험을 안게 하는 불법행위라고 판단한 것이다.

과거 '빨갱이'라는 진보세력 탄압무기가 '종북'이라는 무기로 횡행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 건전한 비판, 대화와 소통이 아닌 백안시·적대시와 비방은 우리 사회가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게 하기보다 ‘보수’ 이외의 모든 주장은 함구하게 되는 역사적 후퇴를 가져올 뿐이다.

위 법원 판결들 또한 ‘종북’이라는 원색적이고 근거 없는 적대시가 아닌 다양한 의견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대한민국을 보다 성숙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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