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붙도록”

6일 현재 1천875일째 투쟁하고 있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이 그예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시구다. 그 전날인 5일에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끝장투쟁을 선언하며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앞 노숙상복농성에 돌입했다. 지난주엔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윤주형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어서야 영도조선소 안으로 들어간 최강서 열사의 시신은 일주일째 방치되고 있다. 모두가 비통한 와중에 2천일 넘게 싸워 온 콜트·콜택 농성장이 경찰과 용역직원들에게 침탈당했다. 공무원노조 간부 100여명이 해직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집단삭발을 했다.

울산·평택·아산·전주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노동자들이 기약 없는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도처에서 노동자들의 속울음 섞인 한숨이 넘친다. 절망이 일상이 되고 있다. 눈을 돌려 보면 한편에서는 새 권력자를 둘러싼 역겨운 추태가 연일 사람들 입길에 오르내린다. 불통 인수위라는 오명 속에 국무총리 내정자가 낙마하고 무자격 헌법재판소장 후보는 몽니로 버틴다. 임기 만료를 코앞에 둔 현직 대통령은 부정적인 국민여론을 무시한 채 측근 봐주기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오는 25일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을 앞둔 대한민국의 볼썽사나운 풍경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나라 안팎으로 극심한 갈등과 분열에 시달려 왔다. 사회양극화 심화로 인한 서민고통 가중에 전쟁 일보 직전까지 치달은 남북관계 악화, 출구가 아득해 보이는 세계경제 위기로 비상신호등이 늘 켜진 상태였다. 1천만 비정규 노동자로 상징되는 노동인권 침해 현실과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가 자초한 계급·계층 간 골 깊은 신분격차 수준의 차별 양상을 염두에 둔다면 박근혜 당선자가 국민대통합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당선자가 가장 먼저 달려가 소통하고 공감하고 문제 개선과 해결을 위해 진력해야 할 곳이 어딘지도 당연해 보인다.

대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거뒀다. 그 외롭고 비통한 심정의 10분의 1이라도 공감한다면 사람 살리는 일에 우선 뛰어들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정치는 사람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후보로서 대외적으로 공론화된 약속도 지켜야 한다. 무신불립이라 하지 않았는가. 신뢰 없이 우리 사회와 정치가 바로 설 수는 없다. 전근대 시절 국왕도 애민을 실천하라 했는데 21세기 민주공화국에서 희망을 찾을 길 없어 삶의 벼랑 끝에서 추락하는 이들의 손을 잡지 않는다면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박근혜 당선자는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란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사회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는다면 국민대통합은 그저 레토릭으로 그칠 뿐이다. 새 정부의 정체성도 이명박 정부의 연장선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박근혜 당선자는 선거에서 자신에게 표를 던진 많은 노동자들을 염두에 둬야 한다. 따지고 보면 노동 관련 공약이 가장 부실한 후보에게 그 공약의 적용을 가장 많이 받을 당사자들이 표를 준 역설을 잘 새겨야 한다. 문재인 후보와 진보정당 후보들의 좋은 노동공약들을 가져와 활용해야 한다. 그게 낙선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자임하는 것이기도 하고 사회통합에도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아가 박근혜 당선자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이 재벌 자본을 비롯한 사용자들이므로 노동 문제, 특히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자신의 네트워크와 자원을 잘 활용해야 한다. 소기의 성과를 오히려 수월하게 거둘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취임식을 앞둔 대통령 당선자가 마음먹기 나름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절실한 심정으로 요청을 드린다. 쌍용차·한진중공업·현대차·유성기업·재능교육 등 정리해고와 비정규직·노조파괴 문제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현장에 당장 찾아가셔야 한다고. 무슨 대안을 가지고 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직접 가서 몸으로 느끼는 게 지금처럼 중요한 때가 없다고. 가서 곤욕을 치를지라도 절망에 빠진 이들의 손을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사회통합이고, 당선자께서 강조했던 국민 전체의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고. 이제 자파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일 시점은 지났다. 오히려 반대파들을 유념해 고통 받는 삶의 현장을 찾는 대통령 당선자의 역발상을 기대하고 촉구한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더 이상 안타깝게 희생되지 않도록.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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