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잘하십시오. 잘되시기 바랍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은 기어가고 세월은 화살이라더니 이 얘기를 들은 것이 벌써 5년 전, 대통령 이명박 취임 축하연에서 당시 천영세 민주노동당 대표의 덕담이다. 언론에서는 취급도 안 했지만 만장의 참석자들은 너나없이 그를 주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분명해 보이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모진 충고를 할 것이라 긴장하고 있는 판에 잘되라니, 모두들 의외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도 3부 요인과 여러 정당대표들 가운데 가장 정겨운 덕담이었으니 말이다. 마침 옆에 있던 어느 지인이 저 친구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나도 당장은 칭찬인지 비꼬는 말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의 품성과 발언의 속뜻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평생 누구를 대놓고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해 본 일이 없다. 누구든 품에 안으려는 사람에 대한 그의 넉넉함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다. 게다가 오랜 운동 과정에서 체득한 변화의 이치를, 평범하다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역사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생각됐다. 어느 한 시기, 정권이 저지른 잘못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우리는 많이 봐 왔다. 곧 민족과 사회발전을 기본으로 하지 않고 권력의 사유화를 위해 정책을 봉사시킨 경우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비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 왔던 것이다. 설사 그 정권이 보수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다음 정권은 그것을 현실적인 기초로 해서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것은 개혁일수도 있고 개량일 수도 있다. 또한 혁명적 변화일수도 있다.

아울러 진보든 보수든 한 정권이 밀고 나가는 정책은 진보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보수정권이 성공하면 더욱 그렇다. 그 반대당과 진보세력은 득세한 보수세력의 공세 속에서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높은 차원의 대안 이념과 정책을 고안해서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진보 보수가 서로 상대방 정책을 제 것으로 만들어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는 상황에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최근 경험도 그 한 예다. 누구나 잘 아는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의제는 사실 진보세력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던 사회발전 전략이었다. 그것을 보수적인 여당과 자유주의 야당이 가져가서 자기들 입맛에 맞게 이런저런 형태로 바꾸어 내놓은 것이 총선·대선 공약들이다. 그러다 보니 공약들이 엇비슷해지고 누가 보수고 진보인지, 불분명해 졌고 진보세력은 존재 자체가 희미해지고 끝내는 내부 모순과 분열로 자멸해 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진보의 가치가 조금이라도 실현된다면 그만큼 사회는 발전하고 삶의 질은 나아지게 될 것이다.

이제 설을 쇠고 보름이면 박근혜 정권은 현실이 된다. 5년을 어떻게 사느냐, 절망한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멘붕상태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채 세상 인연에서 멀어지려고 작심한 사람들도 있다지만 별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객관의 현실은 훨씬 각박한 모습으로 삶을 조여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새 정권은 한 탯줄인 이명박 정권의 실책이 워낙 컸던 탓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위해 차별성을 보이는 데 많은 힘을 들이는 듯하다. 그래서 일정 부분 전향적으로 생각되기도 하고 개혁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국민행복’과 ‘국가안보’를 등치시키면서 각종 공약들이 총론, 각론 따로에다 변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애당초 국방비가 적어 안보에 구멍이 생긴다고 아우성을 치고 수구언론들이 공약이행을 포기해도 좋다는 충고에서 예상되는 일이었지만, 경제위기설에다 미국·중국의 패권경쟁과 북한 핵실험 문제를 빌미로 공약(空約)으로의 전이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 보인다. 이미 각료 인선 과정에 전 정권의 전례가 재연되고 국민행복 약속의 첫 항목인 노령연금이나 4대 중증질환 대책이 변질됐다는 지적은 그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노동 분야에서 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새누리당의 노동공약은 일자리와 노사관계 안정의 두 줄기다. 전자는 고용률 70% 달성으로 집약되고, 후자는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한다. 일자리는 양과 함께 질의 문제가 해결돼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애매한 데다 고용유연화에 대한 근본대책이 서 있지 않다. 또한 노사관계에 대한 문제 해결을 사회적 대화 또는 합의에 맡겼으면서 그 유력한 기구인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존재 자체가 안갯속에 있다. 대통령자문기구인 위원회들을 다 없애고 세 개만 남겨 두겠다는 것이고 보니 혹시 노사정위원회가 폐지되거나 국민통합위원회로 흡수돼 기능이 대폭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일이 새 대통령의 머릿속과 철통같은 인수위 몇몇 참모들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무엇이 어떻게 변화해서 나타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지금까지의 얘기들이 현실화한다면 노사관계 정책은 사실상 ‘반노동’이 아니라 ‘무노동’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설픈 정책을 새로 추진하느니 차라리 있는 법이라도 제대로 지키라는 말이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

현상의 타개가 아니라 현상유지라도 해야 하는 노동운동의 현주소를 보는 듯해 씁쓸하지만 현실의 문제는 권력이 선호하는 ‘법과 원칙’을 원천적으로 벗어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현격한 차별과 사내하청, 용역깡패의 폭력, 무제한적인 손배소 제기, 노동조합 파괴, 무노동 경영의 횡포, 정리해고의 남발, 최저임금제 불이행, 주당 노동시간의 편법적 적용 등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고 노사관계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노동정책의 본령이다.

노동정책을 바닥부터 고치지 못한다면 법이라도 제대로 지키라는 요구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전태일 열사의 항거도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것이었고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악법 조항투성이라는 노동법을 두고도 ‘준법투쟁’으로 노동조건을 유지·개선해 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법을 지키라고 요구하고, 그것을 관철하는 과정에서 운동 전환의 계기를 찾는 것도 변화에 대응하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b@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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