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한국노동사회
연구소 이사장

새 정권의 집권 채비와 전망들이 연일 언론매체를 장식한다. 내용은 각기 처지에 따라 달리하지만 일정한 ‘변화’로 집약된다. 대통령 당선자의 입을 통해 쏟아진 여러 장밋빛 공약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산더미 같은 MB정권의 실정을 빠른 시간 안에 치유하지 않고는 정권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터. 새 정권은 무엇인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고 보면 변화는 불가피하다. 문제는 어떤 변화인가, 어떤 계급적 입지에서 얼마나 깊고 넓고 긴 변화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지자·반대자 모두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아직 초반이지만 대통령 당선자의 말과 행동이 심상치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자는 선거 과정에서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역설했다. 시대를 바꾸자는 소리도 했다. 박정희 시대 이래 누적된 구조적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그래서 대통령 당선자 스스로도 복지·경제민주화·정치개혁이 시대적 의제라고 목청을 높였던 것이 불과 3~4주 전이다. 그런 마당에 과거가 연상되는 언사가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잘살아 보세’, ‘한강의 기적’, ‘경제부흥’, ‘법과 질서’ 등 박정희 독재시대에 자주 듣던 말들이다. ‘잘살아 보세’는 성장론자들이 꿈에도 못 잊는 새마을운동 주제가다. 한강의 기적과 경제부흥 역시 박정희식 근대화론을 칭송하는 키워드다. 혹시 구시대의 과오를 청산하기보다 오랫동안 실추된 ‘영도자’의 권위를 회복하고 가진 자 중심의 성장신화를 복구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그의 행동과 연결돼 많은 비판적 해석을 낳고 있다.

인사가 만사라는데 인수위원회 주요 인사들의 면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미래로의 전향적 변화를 이끌기보다는 역류에 어울리는 수구·보수 색채가 매우 강하다. 반대진영에 대해 ‘저주’의 막말을 퍼부었던 언론인 출신의 수석대변인, 5·16 군사변란과 유신을 ‘혁명’과 ‘영단’이라 찬양하며 한국 근현대사 편찬을 주도한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의 공동대표, 헌법재판소 내부에서도 지나친 보수라고 해서 기피하는 헌재소장 등이 대표주자다. 물론 인수위가 정권의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수위가 최고 권력자의 철학과 가치관을 현실정치에 최초로 투영시키는 기관이고 보면 앞으로의 전망을 가늠하는 데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자료들이다.

새 정권의 국정지표가 대통령 당선자의 입을 통해 연이어 제시되고 있다. 국민통합·국민행복·법 질서에 바탕한 사회안전·성실한 약속이행 등등.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내용들이다. 정도의 차이를 접고 핵심을 요약하면 전임 대통령들도 내세웠던 주제들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정의 최고 집행권자로서 정치·경제·사회구조의 개혁에 관한 얘기보다는 현상·행태에 대한 언급이 대부분이다.

그는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요체로 지목되는 '줄푸세'와 다를 바 없다고 강변했다. 그나마도 이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듯하다. 사회안전을 지켜 국민의 불안을 없애고 대기업의 횡포를 막고 중소기업을 키우겠다고는 하지만 이를 지속화할 수 있는 구조적 개혁방책은 선뜻 제시하지 않는다. 국민통합, 모두들 바라마지 않는 국가적 명제다. 하지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의 반공주의 국민단결론과, 종신 독재권력을 구축해 놓고 정신무장의 첫째 덕목을 ‘국민총화’로 합리화했던 역사, 그 살벌한 유신시대를 경험했던 국민에게는 국민통합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달리할 것인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인수위는 전문성을 기준으로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수위에 고용복지분과는 있는데 노동전문가, 특히 노사관계 전문가는 누구인지 묻는 이가 많다. 일자리 약속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와 최저임금 개선계획도 보인다. 그러나 아직은 멀리 있고 많은 절차와 경로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전하게 살게 해 준다고 하면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간을 다투는 불안하고 절박한 노동자의 생존문제에는 반응이 없다. 체감온도 영하 20~30도를 넘나드는 혹한에 목숨을 걸고 창공에 매달려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얘기는 없다. 전태일재단을 찾아가고 전태일 열사 동상에 꽃다발은 바치면서 정리해고된 노동자와 가족의 죽음에는 의례적인 애도표시도 없다. 그 부하들이 한진중공업 노조간부 빈소를 방문하는 사이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환노위의 국정조사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다. 만일 이것이 노사관계에 대한 시각의 한 징표라면 그가 국민행복의 한 지표로 묘사한 ‘한강의 기적’, ‘잘살아 보세’ 신화는 또다시 개발독재의 악몽으로 노동자들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43년 전 정권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 열사의 불타는 외침이 채 식기도 전에 국가보위법과 유신헌법·긴급조치를 통해 노동기본권을 원천적으로 박탈해 버렸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이룬 고도성장의 훈장을 모조리 저희 것으로 만들어 역사적 영웅으로 군림했다는 사실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아직 노동에 대한 새 정권의 대응을 예단하기는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새 대통령이 긴급한 노동현안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요구가 날로 높아 가고 있고 결자해지식 문제해결을 소망하는 새 정권의 촉구에 이명박 정권의 공식적인 답변이 아직 남아 있다. 새 정권이 진정으로 유신독재정권과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성을 보이고 국민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인가를 판단하는 가늠자는 긴박한 노동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은 철탑에 매달린 노동자들의 절규가 국민 대다수의 요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b@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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