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투표율 상승으로 이길 줄 알았던 야권이 패했고, 야권과 진보진영이 집단 ‘멘붕’에 빠졌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야권이 모두 연합했음에도 100만표 이상의 차이로 무너졌다. ‘새 정치’와 ‘진보정치’와 ‘민주정치’가 모두 모여 정권교체라는 대의 앞에 ‘묻지마 연대’를 했지만, 절대 다수 국민들은 ‘시대교체’로 포장된 새누리당의 집권 연장을 선택한 것이다.

손수조와 김여진의 마지막 찬조연설을 비교해 볼 때 누가 봐도 민주통합당 미디어정치의 압도적 승리였다. 손수조의 연설이 구태의연한 네거티브 선동의 압권이었다면, 김여진의 연설은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생활드라마 한 편이었다. 이 미디어 선거전이 너무 늦게 방영돼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미디어와 상징의 정치라는 현대정치의 흐름조차 바뀌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선거가 끝난 지 이미 닷새나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분석과 해석이 나와 있어 이를 다시 반복하거나 어쭙잖은 글 하나를 더 보태고 싶지는 않다. 칼럼 쓰기가 가장 어려운 시점이다. 특히 극소수 득표를 한 두 노동자 후보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완주후보조차 내지 못한 제도권 진보진영은 이번 대선을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희망이 있을 때 성찰에 대한 욕구도 강한 법이다.

대신 상상적 도피를 한번 해 보자. 민주통합당이 승리해 정권교체를 이뤘다고. 공약이나 인적 구성 혹은 과거 정치역정을 보더라도 새누리당보다는 분명 더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정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공약이나 인적 구성 혹은 과거 정치역정을 보더라도 그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은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시장 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공정한 사회를 약속하는 이른바 과거 재야 민주 세력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지속된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이 상상적 도피는 또 다른 실망으로 연결될 공산이 크다.

국민들이 보수적이라고 낙담할 필요가 없다. 현재도 고정적 이념 지형으로 볼 때, 보수층이 진보층보다 두텁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화 역사가 증명하듯이 과거에 비해 보수층은 더 얇아졌으며 진보층은 더 두꺼워졌다. 아직 그 역전이 이뤄지지 않았을 뿐이다. 반세기 넘게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해 온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역사도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상상적 도피에 다시 한 번 들어가 보자. 현재와 같은 이념 지형에서 정권교체를 이뤘다면, 그것은 국민들의 정서에 영합해 거둔 결과라는 얘기가 된다.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데 급격한 진보정책을 펼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공약과 다른 정책을 펼치거나 국민을 기만해서 집권했다는 비판을 받아 시민사회의 동의구조를 깨트려 진보진영의 장기적 발전을 저해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진보세력이 보수 국민들이 원하는 보수적인 정당으로 변절한 경우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제도권 정치를 개혁으로 이끄는 사회권력의 힘이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것은 상상적 도피 이후에 느낄 실망을 다른 거울로 미리 보는 것일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적어도 담론으로나마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내세우고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그동안 키워 온 사회권력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상상 속의 문재인 정권도 사회권력의 압력이 없다면, 시장 자유주의 세력의 발호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보수적인 정서를 바꾸고자 노력하며 이를 사회권력의 힘으로 묶어 내는 것이 정권교체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다.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byungkee@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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