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국내 유일의 공영방송 EBS(교육방송)는 2005년 1월 32부작 문화사 시리즈를 방영했다. 모두 3편으로 된 이 대형 시리즈물은 EBS로서는 엄청난 대작이었다. 교육방송으로선 드물게 전문 연기자를 동원한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를 섞었다. 당시 드라마 <명동백작>과 <지금도 마로니에는>은 많은 인기를 누렸다.

<지금도 마로니에는>은 박정희 정권의 암울했던 60년대 정치와 문화·문학을 잘 그려냈다. 당시 문화사에 획을 그은 대표적 인물들의 삶을 통해 시대정신을 드러냈다. 제목이 상징하는 ‘마로니에’는 지금은 서울 대학로 젊음의 거리로 변했지만, 당시엔 서울대가 위치한 60년대 대학가 풍경을 그렸다. 고등학생으로 4·19 혁명을 겪고 권위와 기성세대에 맞서 변혁의 정신으로 시대를 이끌었던 청년세대들이 나온다. 더 정확히는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를 드라마의 배경으로 했다.

시 <오적>으로 60년대의 아이콘이었던 김지하도 드라마에선 본명 ‘영일’로 나온다. 소설 <무진기행> 등 빼어난 문체와 농밀한 캐릭터로 한국문학사에 명성을 독차지했던 작가 김승옥은 감수성 깊은 다소 소심한 대학생으로 그려졌다.

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이끌며 학생운동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6·3 세대의 선두주자 김중태는 신출귀몰한 천재 지도자로 나온다. 김중태 역은 당시 탤런트 최철호가 맡았다.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 역을 했던 그를 캐스팅한 것이다.

김중태 앞에만 서면 이부영·김덕룡도, 심지어 김지하조차 열등감을 느낀다. 이렇게 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는>은 김지하·김승옥·김중태 3명을 중심축으로 천상병 시인과 요절한 천재 여류수필가 전혜린 등을 뒤섞었다. 천상병 시인 역은 전 민주당 국회의원 최종원이, 전혜린 역은 배우 이재은이 맡았다.

EBS는 이 드라마를 만들면서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를 ‘깨어 있는 청년정신’이라고 했다. 그중심엔 단연 김중태가 서 있다. 김중태는 40년생으로 61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62년 군정연장 반대투쟁, 63년 한미행정협정 개정반대투쟁 때 거리에서 뛰어난 연설과 지도력으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64년엔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을 주도하면서 6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60년대는 결단코 박정희와 김중태의 대결장이었다. 박 정권은 때마다 김중태를 투옥시켰다. 60년대에 6번이나 구속돼 6년의 옥살이를 했던 김중태는 69년 출옥 후 박 정권이 내민 미국유학 카드를 받아들여 80년에야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총선에 여러 번 출마했으나 번번이 실패한다. 이후 재야사학자로 살아왔다.

출옥 직전 아들을 찾아온 아버지와 면회한 뒤 고뇌하는 김중태의 모습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랬던 김중태가 지금은 새누리당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대통령선거 방송연설원이 돼 16분짜리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20대 청년기를 돌아보면서 “용공분자로 조작됐지만, 나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다”고 말한다. 그가 70대 노인이 됐지만 한국 진보의 뿌리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진보는 이렇게 ‘보수’에 철저히 기반하고 있다.

김지하는 그의 오랜 친구다. 오늘날 두 사람의 말년은 당연한 귀결이다. 지금 민주통합당에 서서 ‘진보’라고 주창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토록 한국 진보의 보수적 기원은 깊고 길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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