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는 '업무상 질병의 판정 업무를 신속·공정하게 처리하기 위해' 설치됐다. 질판위 규정의 제1조인 설치 목적이다. 그런데 질판위가 '신속'한 것은 인정하더라도 '공정'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주위에 거의 없다.

얼마 전 한 선배 노무사는 질판위가 위원들을 믿지 못한다는 얘기를 했다. 질판위 심의안의 신청인 개요란을 보면 '신청인 및 재해자의 성명, 각 주민번호, 재해자와의 관계, 주소·연락처·사업장명·업종·소재지' 등이 공란으로 돼 있기 때문이란다. 실제 질판위 심의안을 확인해보니, 이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신청인 개요란이 공란이었다.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다.

몇 달 전 민주노총에서 질판위 위원 참가를 결정하고 난 뒤 실제 참가예정인 몇 분이 전화를 주셨다. "심사위원회도 심의안만 주고 다른 서류들은 위원들에게 주지 않느냐"고 물은 것이다. 질판위가 심의안 이외 서류를 위원들에게 사전에 공개하지 않은 것은 이미 제도가 생긴 이후부터 '확고한 관행'이였다.

심의안의 작성은 질판위 소속 공무원이 작성한다. 난해하고 어려운 질병 사건도 4페이지 정도로 요약을 한다. 대리인 공인노무사가 선임돼 수 십 페이지 재해경위서와 각종 증거자료를 제출하더라도, 심의위원들은 이러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 재해자 및 대리인들이 강조하는 중요한 요건과 내용, 기초사실 등이 심의안에서 배제될 수 있다.

뇌심혈계질환의 경우 질판위 심의안 4페이지에는 신청인 개요와 재해발생경위가 약 1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재해 전 업무수행내역에 있어 재해 전 7일간 업무수행내역, 3개월간 업무수행내역이 표로 약 1페이지를 차지한다. 그밖에 평소 건강상태·근무환경 등이 약술돼 있다. 특히 기존력을 도표로 정리함으로 인해 재해자의 기존질환을 강조하고 있다. 업무적 스트레스 요인은 그야말로 몇 줄로 요약됐고, 회사에서 주장하는 내용도 반영돼 있다. 마지막으로 자문의 소견, 주치의 소견이 기재돼 있으며 관련 첨부 서류 목록도 포함된다.

이런 심의안이 어떻게 기본 자료가 되고, 심의회에서 이를 두고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을 지 의심된다. 법리적 적합성이 전혀 없는 노동부 고시에 짜 맞춘 듯 한 재해당일, 재해 전 7일간, 3개월간의 업무수행내역을 중심으로 조사된 것이 기재돼 있다. 반면 과거 수진내역, 자문의 소견을 중심으로 한 심의안에서 업무상 질병으로 판단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어렵다. 

문제는 원처분기관의 조사내용(즉 조사복명서)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별도의 질판위 사건 담당자의 조사나 관계 전문가 등에 대한 업무관련성 평가 의뢰(질판위 규정 제8조 제4항) 등이 거의 실시되지 않는다. 질판위 심의안이 이후 심사위원회, 재심사위원회의 심의안 기초 자료가 된다는 측면에서도 최초 심의안이 구체적으로 작성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산재 사건의 성격상 공인노무사들이 노동자와 그 유족을 대리한다. 공인노무사들이 산재승인을 받기 위해 사건 조사와 서면작성, 증거수집 등을 위해 노력하는 시간과 비용은 엄청나다. 그런데 공인노무사들의 대리권은 완전히 묵살됐다. 공인노무사회가 '대리권 침해신고센터'를 운영하는 것보다, 이런 문제에 대해 항의하고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그 존재 의의가 아닐까 싶다.

덧붙여 재심사위원회는 이미 거의 모든 자료를 위원들에게 공개하고 있고, 심사위원회도 이런 방향으로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남은 건 질판위 뿐이다. 언제까지 공란을 둔 4페이지 심의안만을 위원들에게 줄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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