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민주주의가 어떤 사회적 효과를 낳느냐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그 나라 정당 정치가 어떠냐 하는 데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를 정당론자 혹은 정당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당이 모든 것은 아니라고 응수한다. 지금은 정당 정치의 시대가 아니라 시민 정치의 시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가 내지 중앙정부, 나아가 정당 중심의 접근을 버리라며 마을 단위에서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대안으로 말하기도 한다.

정당이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시민운동이나 마을 차원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도 없다. 정당 정치가 중요하다는 생각 역시, 정당 정치를 좋게 해 평등한 시민 참여의 기반을 확대하고 궁극적으로는 협동과 연대의 삶을 살 가능성을 풍부하게 하는, 민주적 이상을 지향한다. 아마도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세끼 식사가 좋아야 할 것이다. 그게 기반이 돼야 적절한 운동과 명상 그리고 다양한 보조 영양제의 효과도 좋을 것이다. 정당은 세끼 식사와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와 그렇지 않은 체제를 복수정당체제의 유무로 판단하듯이, 정당은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본질적인 기준이다. 아무리 운동이나 휴식·명상·영양제가 건강에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세끼 식사를 대신할 수는 없듯이, 민주주의라면 그 어떤 것도 정당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혹자는 지금 정당들의 모습을 보고도 그러냐고 항변할 수 있겠으나, 기존 정당을 좋게 만들거나 아니면 기존 정당보다 더 좋은 정당을 만들거나 하지 못한다면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본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 역시 민주화 초기 단계에서 정당은 홀대받았다. 보수쪽으로부터는 국민 전체의 일반의지를 대표해야지 왜 이념과 계층적 차이를 조직하는 정당을 만들어 사회를 분열시키느냐는 힐난을 들었다. 진보 안에서도 직접 행동이나 반체제적 운동을 강조하는 사람들로부터 정당 정치는 쉽게 비난 받았다. 서유럽의 진보를 기준으로 볼 때 대중정당을 통해 민주정치에 참여하는 것의 가치가 다수에게 지지받는 데는 거의 한 세기가 필요했다. 그 뒤 진보정당의 성장은 빨랐다. 스웨덴의 경우 한 때는 성인의 3분의 1 가까이가 사민당 당원인 적이 있었고 다른 서유럽 국가들 역시 유사한 경험을 했다. 정당에 의해 시민의 정치 에너지가 조직됨으로써 국가 관료제를 민주적 통제 하에 둘 수 있었고 경제 권력을 규제할 수 있었으며 계층적 불평등을 완화하고 통합과 연대를 위한 사회정책을 꾸준히 실천할 수 있었다. 독일은 다양한 형태로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확대함으로써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을 민주화해왔는데,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적은 노동시간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제조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전 세계 수출 총액 가운데 부동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몇 년 전 독일의 한 가정집에 보름 정도 머물면서 과연 이 나라를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북유럽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들 나라들에서 국가는 권력기구가 아닌 공동체에 복무하는 기구 내지 기능 집단 같다고 말하곤 한다. 정당의 존재는 모든 곳에서 발견되지만, 당원이 될 필요는 점점 줄어드는 것도 이들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이다. 좋은 정당을 통해 정치가 좋아지고 경제가 좋아지고 사회가 좋아지면서 거꾸로 정당의 역할이 공적 기구 곳곳으로 용해되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당원이 되거나 정당 행사에 참여하는 일보다, 자신의 지지 정당이 집권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수많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기존 정당이 경직되는 듯이 보이면 녹색당이나 해적당과 같이 새로운 정당이 등장해 기존 정당체제에 충격을 주기도 한다.

우리도 이랬으면 좋겠다. 좋은 정당이 시민의 정치에너지를 잘 조직해 정치를 좋게 만들고 그 힘으로 국가 기구 전반을 민주화함으로써 경제 권력에 의한 불평등 효과를 완화하고 사회를 공동체적으로 재조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우리는 제대로 된 정당, 제대로 된 정당 정치가 안 돼서 고통 받는 것이지, 정당의 시대가 끝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좋은 진보정당을 꿈꾼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parsh03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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