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보
한국노동사회
연구소 이사장

누가 말했던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 이외에는 모든 것은 변한다고. 어떤 시대, 어느 구석이든 달라지기 마련이지만 삶과 의식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만큼 큰 변화를 거듭한 곳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세계 15위의 경제규모와 선진 자본주의국가에 버금가는 대량소비 경향, 한류로 표현되는 독특한 문화의 세계적 진출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 등이 이뤄졌다. 다른 한편에는 사회·경제의 양극화, 노동의 유연화, 저출산·고령화·자살·이혼 등 세계 정상급을 다투는 부정적인 현상도 속출하고 있다. 여기에 반민주적 인권·노동탄압이 음영을 더 짙게 한다.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 사회복지·경제민주화·정치개혁 등을 여야 모두 핵심 공약으로 내놓은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잘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 판을 완강하게 휘어잡고 있는 흐름은 그런 민중들의 갈망을 해결하는 희망찬 미래가 아니다.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과 세력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이른바 ‘유신의 추억’, ‘박정희 환상’이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들이 그것이다. 이들의 뇌리에는 박정희만이 오늘의 풍요를 가져왔다는 믿음이 신앙처럼 강하게 뿌리잡고 있다. 일인독재 영구집권을 위한 박정희의 숱한 악행들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간단하게 치부한다. 오로지‘보릿고개를 잊게 해 준 은인’, ‘성장신화의 영웅’의 정신을 살려 그 후예들이 정권을 잡아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이런 시대인식은 불행히도 상당히 많은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의 착시 또는 환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연 오늘날 한국의 성과는 오로지 박정희의 공인가.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고스란히 인정하는 이런 논리는 어디서 발원한 것일까. 한 연구자는 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거의 잊혀져 가던 박정희를 살려 낸 것은 이이러니하게도 문민정권이라 자부하고 생전에 최대 정적이었던 김영삼 정권이었다고 한다. 김영삼 정권의 임기 중반 김현철의 비리와 경제난이 겹치면서 박정희 환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한국당 대선후보들이 앞을 다퉈 박정희 찬가를 불러 댔고 외환위기가 구체화하자 박정희 유령은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부패와 비리·무능이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이고 김대중·김종필 연합정권, 박정희기념관의 건립 지원, 사회양극화 심화가 박정희 신화를 현실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발전 사이에 양자택일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분명해져 있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이 박정희 독재정권이 이룩한 성과라는 주장의 근거도 사실상 설 땅이 없다. 실제 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은 박정희 정권의 독창적인 정책이 아니라 제3세계의 도전에 직면한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박 정권은 외국차관을 들여와 자본을 앞세워 개발을 추진했다. 따라서 자본의 이윤축적의 필요충분조건은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과 장시간 노동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극도의 탄압은 필연이었다. 여기에 급속한 성장을 위해 대기업과 수출산업에 막대한 재정·금융상의 특혜와 지원을 제공해 거대한 독점재벌을 형성했다. 결국 노동자들에게 줄곧 주어진 것은 근대화의 역군이라는 입에 발린 칭송과 함께 생계비 이하의 저임금과 세계 최장의 장시간 노동이었다.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열악한 작업조건, 사회적 천시와 인권유린뿐이었다. 이것이 세계가 부러워하는 압축성장의 비밀이다. 경제성장이 박정희의 덕이라는 주장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강제해 독점적 이윤을 보장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자본에게는 감사와 보은의 대상이며 신화의 주인공이다. 또한 그는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산물인 경제성장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박정희 독재권력은 경제성장을 물질적 기초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질이 이러함에도 박정희 신드롬이 통용되는 것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후예들이 여전히 권력을 틀어쥐고 시장경쟁주의 영웅사관을 완강하게 전파한 데서 비롯됐다.

다가오는 대선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아픔이 바로 자본우위·노동희생의 경제성장 전략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데 있다. 나아가 성장신화 극복의 명제로 제기되고 있는 사회복지·경제민주화·정치개혁의 쟁취는 박정희 신드롬을 해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회발전이 어느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의 피땀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자긍심을 되찾는 과정이자 소중한 보람이 될 것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45@yahoo.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