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권위주의의 언어이며, 따라서 국민이라는 말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동의를 얻었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권위주의 대통령의 담화를 보고 들었던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이제 모두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국민을 앞세우는 세상이 됐다. 국민 배우, 국민 엠시, 국민 여동생 등등 대중문화에서 '접두사 국민'이 유행하는 것도 듣기 불편한 일이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정치인들이 언제부터인가 국민 담론을 즐겨 사용하는 데 있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의 민주정치가 유권자 속에서가 아니라 유권자 앞, 아니 언론 앞에서 마치 대형 쇼처럼 이루어지면서 심화된 현상인 듯하다. 각 후보 진영의 담론을 보면 국민이란 용어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를 금방 알 수 있는데, 그렇듯 상투어로 자리 잡은 국민 홍수 시대에 이른 바 시민주권이라는 민주적 이상이 얼마나 공허한 것이 됐나를 생각하게 된다. '국민 여러분께서'라는 후보들의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계층과 지역 나아가 이념과 가치를 달리 하는 사회 집단으로서 시민의 구체성이 조각처럼 부서져 무정형의 투명한 빛 속으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물론 국민이라는 말을 안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국민국가라는 정치 단위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다른 말로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 이유가 있고 또 필요한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이라는 말이 무차별적으로 과용되면서 민주정치의 다른 언어들이 왜소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국민이라는 표현은 절제되고 줄어드는 것이 정상인데, 그 반대의 경향이 점점 커져 어느덧 국민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는 언어가 됐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했던 민주당,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내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를 말했던 진보정당들의 정치 담론은 마치 옛날이야기가 된 듯하다. 정당과 후보가 대표하는 시민 집단은 마치 케이크 조각처럼 나뉜 여론조사 지지율 숫자로 획일화됐다. 모두가 더 큰 케이크 조각(여론조사 지지율)을 받아야 한다며 연신 '국민 여러분'을 외쳐대는 게 오늘의 선거가 돼버렸다. 그 속에서 정치는 기존 미디어든, 뉴미디어든 '매개된 추상의 영역'에 있을 뿐 시민 생활과는 거의 완벽하게 유리돼 있다. 영세 인쇄업자들에게 일감이 됐던 그 많던 유인물들도 사라졌고, 후보자와 유권자 사이를 연결하는 그 많던 모임들도 이제는 볼 수가 없게 됐다 시민 생활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선거의 '분배 효과'가 사라지면서, 선거 때문에 불경기가 되고 장사가 안 되는 초유의 일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주의란 한마디로 말해 '부분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집단적 갈등과 차이, 열정들이 몇 개의 ‘부분(part)’으로 조직될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이 공익의 둘러싼 경쟁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 ‘부분’들을 가리켜 정당(party)이라고 하며, 그런 복수의 정당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를 구분한다. 중국이나 북한 사회주의가 제 아무리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고, 과거 군부정권들이 '민족'과 '국민'을 소리 높여 외쳐도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집단적 차이와 열정,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둔 파당적 경쟁이 정치의 과정을 활력 있게 만들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그 가치에 맞게 기능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일수록 갈등적이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이견·차이·토론·경쟁을 민주주의의 엔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 빈말이 아니다. 그런데 국민을 앞세워 그런 차이를 초월할 수 있는 어떤 '일반 의지'가 있는 듯이 말하고, 정당과 같이 조직화된 의견 집단의 공익적 역할을 폄훼하면서 국민이 직접 공천하고 국민이 직접 정치하면 좋을 듯한 환상을 자극하고, 마치 국민과의 소통 잘하면 모두를 위한 공익을 거저 실현할 수 있을 듯이 말하고, 사회 갈등의 표출하고 조직화하는 것을 집단 이기주의라고 비난하고, 토론과 논쟁 대신 콘서트를 하고,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시대정신을 너나없이 앞세우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정치가 되고 말았다. 모두가 국민을 앞세우지만 그때의 국민은 선량한 백성이나 똑똑한 소비자 이상이 될 수 없는 이런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국민이 선출하니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필자는 이를 군주정이나 귀족정에 가까운 민주주의 혹은 파시즘적 충동이 스멀스멀 불러들여지고 있는 민주주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권자로서 보통의 시민을 더 깊고 넓게 소외시키고 있는 이번 선거를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하는 게, 필자는 몹시 괴롭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parsh03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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