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한글날이 22년 만에 공휴일로 재지정된다. 한글날 공휴일 지정을 반대한 경제부처와 재계의 오랜 논리는 "공휴일이 너무 많아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1970년 법정 공휴일로 지정된 한글날이 91년 국군의 날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된 이유도 10월에 연휴(국군의 날·개천절·한글날)가 집중돼 "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재계의 주장이 거셌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휴일을 확대하면 자영업자·임시직 등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며 한글날 공휴일 지정에 강하게 반대해 왔다.

재계의 주장에 대해 한글날 공휴일 지정에 앞장서 온 이건범(47·사진) 한글문화연대 상임대표는 “언제부터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자들을 생각해 줬는지 모르겠다”며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를 망가뜨리는 주범은 오히려 대기업이 아니었나”라고 반문했다.

대표적 한글지키기 시민운동단체인 한글문화연대는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 추진과 함께 관공서 등에서 쓰는 어려운 한자·영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일을 하는 사단법인이다. 이건범 대표는 지난달 경총 앞에서 "한글날 공휴일 지정 반대입장을 거둬 달라"는 의미의 ‘도끼상소 상징의식’을 벌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8일 서울 마포구 한글문화연대 사무실에 만난 이 대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노동시간이 1천800시간인데, 우리나라 노동시간은 2천200시간으로 400시간이나 초과근무를 하고 있다”며 “경총은 우리 국민을 놀 생각만 하는 사람들로 포장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문화를 경제논리로 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재계의 경제논리가 아니더라도 "쉬지 않더라도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지 않냐"는 의견이 여전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이 대표는 “밸런타인데이에 왜 초콜릿을 주고받겠냐”고 되물었다.

“밸런타인데이에 사람들이 초콜릿을 사면서, 누구한테 초콜릿을 줄 것인지, 나는 이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밸런타인데이에 상혼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우리 말글과 나, 사회와의 관계를 되짚어 볼 기회를 잃어버린 거죠. 한글날이 몇 월 며칠인지 잊어버린 사람들도 많을 걸요?”

2000년 한글문화연대 평회원으로 가입해 지금까지 한글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측면에서 이 운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표는 “사람들이 말과 글을 사용하는 데 있어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데,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쓰는 말부터 너무 어렵다”며 “외국어나 어려운 말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공공언어는 국민의 알권리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한글은 인권이며,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와 공공기관부터 어려운 말을 모르는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많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글문화연대는 적지 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은 물론이고, 최근 서울고등법원이 발간한 ‘항소심 안내서’에서 99개의 어려운 말을 쉬운 말로 고쳤다. 서울시가 ‘쿨비즈(여름철의 간편한 옷차림)’를 ‘시원차림’으로 바꿔 쓰기로 결정한 것도 한글문화연대의 ‘쉬운 말 사랑패’ 교육을 받은 한 중학생의 제안으로 이뤄진 일이다.

한글문화연대는 지난 9월 서울시가 개최한 ‘공공언어 시민돌봄이 한마당’에서 ‘데이케어센터’를 ‘어르신 쉼터’로, ‘서울문화바우처’를 ‘서울문화이용권’으로,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안전문’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해 박원순 시장의 약속을 이끌어 냈다.

이 대표는 “내년에는 산업용어를 고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방침”이라며 “시민들도 한글날 공휴일 재지정을 계기로 어떻게 하면 한글을 품격 있고, 효율적이고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을지 애정을 갖고 함께해 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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