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김영훈(44·사진) 민주노총 위원장이 임기를 두 달여 앞두고 7일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김 위원장은 이날 오후 서울 중구 민주노총 13층에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위원장직무대행인 정의헌 수석부위원장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민주노총은 이날 중집에서 다음달 11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고 차기 임원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사퇴 직후 민주노총 14층 위원장실에서 만난 김 위원장의 얼굴은 피로해 보였다.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도 눈에 들어왔다. 지난 2년9개월간, 특히 올해 통합진보당 사태와 임원직선제 갈등을 겪으며 진을 다 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어젯밤에 (위원장 당선 이후) 처음으로 숙면을 취했다”고 홀가분해했다.

‘최연소 위원장’으로 당선돼 ‘젊은 민주노총’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며 임기를 시작했던 김 위원장. “현장으로 복귀해 ‘꿈꾸는 기관사’로 돌아가겠다”는 그가 지난 2년9개월간 맞딱드렸던 현실은 어땠을까.

- 임기를 채운 첫 민주노총 위원장이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결국 두 달 남기고 물러났다. 아쉬울 거 같다.

"고맙고 죄송하다. 능력에 비해 여기까지 온 것을 과분하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정말 민주노총만한 조직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도 2005년 민주노총 폭력사태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지난 시기 민감하고 중요한 논의를 할 때 한 번의 충돌 없이 질서 있게 토론했다. 대중조직의 대표들이 얼마나 민주적 소양에 충실한지를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 임원직선제 얘기를 안 할 수 없는데.

"일각에서는 민주노총이 임원직선제를 내팽겨쳤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직선제 관련해서 논문을 하나 써도 될 정도로 많은 시간을 쏟았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직선제가 마치 민주주의의 척도인 것처럼 과도하게 의미부여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선제가 과연 직접민주주의의 확장일까. 민주주의를 위해 직선제를 하자면서 선거인명부를 안 준 노조의 선거권을 박탈한다? 의무금을 내는 순으로 투표권을 줘야 한다? 의무금 미납 단위들 중에는 정말 재정이 열악하고 노조 명맥조차 어렵게 이어 가는 곳이 많다. 그런 곳들을 배제하면서까지 직선제를 할 수는 없었다."

- 그렇다면 왜 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고 했나.

"진정성의 문제였다. 사퇴가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의원대회가 또다시 유회됐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하다.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내려놓고 (직선제 3년 유예안 통과를) 호소하는 게 도리에 맞다고 판단했다."

- 올해 3월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8월 총파업으로 80점, 대선 때는 100점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몇 점으로 마감한 것인가.

"60점 정도?(웃음) 낙제를 면하지 않았으면 다행이라고 본다. 실제 총파업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직선제보다 그 문제에 더 큰 책임을 느낀다. 총파업 성사는 못했지만 민주노총이 오랜만에 도심시위를 했고, 작은 노조들이 많이 참여해 민주노총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고 생각한다."

- 민주노총이 96~97년 총파업 이후 총파업을 성사시킨 적이 없다. 무엇 때문인가.

"외국 사례에서 보듯 보통 내셔널센터가 지도하는 총파업은 다수의 국민이 공감하는 사회공공적 의제를 가지고 (파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르코지의 연금개악안에 맞선 프랑스 총파업이나 국가 긴축재정에 반대하는 그리스나 남유럽 국가들의 파업이 그렇다. 우리나라 노동계가 ‘노조법 전면 재개정’을 의제로 총파업을 하지 못한 건 낮은 노조 조직률 때문이다. 노조 조직률이 적어도 30~40%가 된다면 절대 다수 국민이 노조법 재개정을 자기문제로 생각할 것이다. 해결방안은 역시 노조 조직률을 높이는 데 있다. 그래야만 민주노총의 파업이 딴 나라 얘기가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의 얘기가 될 수 있다."

- 임기 동안 아쉬웠던 게 있다면.

"민주노동당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두고두고 한스럽다. 진보정치대통합 논의를 할 때 일부에서는 ‘도로 민주노동당 하려고 하냐’고 얘기했다. 그분들에게 묻고 싶다. 민주노동당이 어때서? 당장의 의석수를 떠나 노동자들이 자기정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통합은 진정성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민주노총이 진정성은 있었지만 실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노동의 이름으로 통합에 재를 뿌리지 말라’는 주장부터 ‘민주노총의 지지가 되레 새로운 진보정당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그런 중에 스웨덴 사례를 공부하며 ‘노동자여, 노동자당에 투표하라’는 구호를 보고 가슴을 쳤다. 노동만큼 대중적이고 진보적인 게 어디 있나. 노동자란 게 자랑스럽고 ‘노동자여, 노동자당에 투표하라’는 구호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어제(6일) 통합진보당에 탈당계를 냈는데. 다시 진보정당 당원으로 가입한다면, 어디를 선택하고 싶나.

"지금 특정정당에 가담할 생각은 없다. 사실 민주노총 위원장으로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철회를 결정했을 때 탈당했어야 했다. 그런데 노동계급의 대표자로서 단결을 호소하던 사람이 (노동계가) 줄줄이 탈당하는 상황에서 (탈당계를 내고) 분열을 가속화하는 데 일조하기는 싫었다. 어제 탈당사유에는 ‘민주노동당을 지키지 못해서’라고 썼다. 새로운 진보정치가 만들어지면 그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민주노총의 대선방침이 확정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지지후보가 있나.

"투표는 할 것이다. 누구를 선택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가 단일화 논의를 시작했다. 누구로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보나.

"일각에서는 안철수 후보를 폄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고 본다. 그가 없었다면 이번 대선도 지난 대선 때처럼 ‘박근혜 대세론’으로 흘러갔을 거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판단이 안 선다.

문재인 후보는 94년 전국기관차협의회 파업 이후 부산지부에서 구속자가 속출할 때 변호를 맡아 준 인연이 있다. 성실하고 진정성 있게 변호해 줬다. 참여정부 시절 철도 민영화로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을 때 사이가 나빠지긴 했지만…. 얼마 전 문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민주노총을 방문했을 때 감회가 새로웠다. 민주노총 위원장과 대통령 후보로 만날 줄은 몰랐지 않았겠나. 이게 운명인가.(웃음) 문 후보가 타운홀 미팅에서 “두 번 실패하지 않겠다”고 말한 게 인상 깊었다. 그 진정성은 믿고 싶다."

- 민주노총 혁신이 화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난 55차 대의원대회의 가장 큰 의미 중 하나는 직선제 유예안 통과를 넘어 이제 몇몇 정파조직이 민주노총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정파조직의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정파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대의원대회에서 유예안이 통과된 게 불가사의하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불가사의한 게 아니라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고민했던 대의원들의 힘이다. 정파가 민주노총을 좌우했던 시대가 저물었다. 정파 또한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앞으로 통합의 리더십이 민주노총의 새로운 지도력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 또 한 번 도약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직선제든 뭐든 논의해서 진행하면 된다."

-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본의 아니게 ‘젊은 원로’가 됐다.(웃음) 전직 위원장으로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힘쓰고 싶다. 정당인으로의 삶보다는 노동자로서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노동자의 이름으로 진보정치를 살리고 싶다. 당장 내일은 백기완 선생님과 ‘남영동1985’ 시사회를 본 뒤 점심식사를 할 예정이다."

- 조합원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말 고맙고 너무 죄송하다. 2년9개월 동안 부족한 지도부와 함께해 주셔서 고맙다. 대한문 앞에 단식을 하고 있는 동지들이 있고, 철탑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동지들도 있다. 중요한 시기에 투쟁과제를 완수하지 못하고 물러나서 죄송하다.

이제 민주노총은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시점이다. 이명박 정부 5년을 모질게 버텨 오지 않았나. 우리 사회에 민주노총만한 조직은 없다. 가장 민주적이고 진보적이며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낼 수 있는 조직이다. 변함없이 민주노총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겨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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