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
새누리당 의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당 간사)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이다. 무덤덤할 수 없는 치열한 정치현장의 한복판에서 특정정파에 귀속되는 노동계 지지선언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계절을 오판해 조바심으로 피어나는 봄꽃의 호사스러운 만개(滿開) 같다.

사실 정치권의 노동계 구애는 대선 같은 큰 선거에서 노조는 뭉칫표가 된다는 사실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산업현장 근로자들의 정서와 동떨어진 판단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캠프의 불행은 늘 바닥 서민의 관점과 어긋나는 데 있다.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선거전에서 표 계산을 하는 쪽에서는 노동계 표심을 잡고 싶으리라 이해는 되지만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윗선의 노조지도자들이 제아무리 특정후보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조합원의 정치의식까지 지배하면서 표심까지 강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솔직히 노조 상층부 중심의 지지선언은 득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노동운동의 정체성을 훼손시키고 노사상생마저 저해하는 폴리유니온을 양산할 뿐이다. 당장 19대 국회부터는 국회선진화법 제정으로 여야 합의를 거치지 않은 법안은 제·개정하기 힘들다. 일부 폴리유니언의 주장대로 노동계의 최대 현안인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재개정을 특정정당과의 결합만으로는 이끌어 내지 못할뿐더러 노동운동의 자주적 위상도 강화하기 힘들다.

노동운동은 자율성을 그 존재목적으로 한다. 정치는 노동운동의 목적이 아닌 수단이 돼야 한다. 대선캠프에 합류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상층부 노조간부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자칫 실제 노동현장과 정책의 괴리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선거를 지향해야 할 대선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다. 기륭전자·쌍용자동차·재능교육 등 여전히 장기 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현장의 아픈 존재들을 호명하지 못한 채, 과거와 오늘의 노동운동을 훈장 삼아 정치권에 노동운동 유공자인 양 투항한 이들을 끌어모아 실질 없이 외형만 키운 대선후보의 노동행보는 그래서 실효적이지도 않고 진정성도 없다.

노동운동을 하다 정치권에 줄을 서는 폴리유니온들은 하나같이 "노조법 재개정과 국가의 미래를 위한 힘든 결단을 했다"고 말한다. 여기가 자신이 설 무대가 맞는지를 돌아보는 노동운동가는 극히 드물다. 이들 탓만 할 것은 아니다. 정치권의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 새누리당부터 노동계 줄 세우기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대선후보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25년 전,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세계 노동운동사에 우뚝 선 기적이었다. 국민 속에 생동하는 합리적이고 올바른 노동운동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우리사회에게 가져다준 성과를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 중립성 속에 자주성을 갖는 일이다. 이익집단인 노조가 자신의 이익을 제도권에 투영할 수는 있지만 폴리유니온처럼 특정정당에 복속돼 자신들의 정치적 지분을 요구하는 건 노동운동 공공의 이익을 투영하려는 과정이 아닌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것일 뿐이다.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노동운동의 진정성과 필요성을 확신한다. 12월 대선의 핵심 어젠다로 논의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도 사실 노동운동의 정직한 역할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 폴리유니온들은 노동운동의 본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야 정치권이여, 더 이상 노동운동을 사고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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