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공인노무사

역학조사 결과는 직업성질병에 대한 산재승인 여부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 등을 계기로 안전보건공단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에 대한 논란이 일자 얼마 전 고용노동부는 역학조사제도를 개편했다. 하지만 반올림 등이 그동안 핵심적으로 제기해 온 문제점은 개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핵심을 비켜 간 개편’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역학조사에 재해노동자의 참여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 산재보험 청구권자인 재해노동자나 그 유족이 작업환경측정에 참여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유해요인을 찾아내 업무관련성을 입증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예컨대 다양한 종류의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작업환경에서 특정 유해요인을 찾아내고 해당 질병과의 업무관련성을 입증하는 것은 고도의 과학적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이다. 따라서 역학조사에서 노동자의 참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면, 재해노동자나 그 유족이 추천하는 전문가가 역학조사 전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고용노동부가 개정한 운영지침에는 노동자나 그 유족이 추천한 전문가는커녕 노동자나 그 유족조차도 역학조사시 입회할 수 있는 근거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다. 직업성암을 인정받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이유는 업무와 질병 간의 인과관계 입증책임을 재해노동자에게 부담시키면서도, 그 입증을 위한 최소한의 기회(권리)조차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권리보장 측면에서라도 재해노동자가 추천한 전문가가 역학조사 전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이와 함께 역학조사에서 사업주의 참여권이 과도하게 보장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사업주는 작업환경의 유해요인을 은폐·축소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를 받아야 할 사업주가 역학조사에 참여하는 것은 공정한 역학조사가 이뤄지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데도 연구원은 매그나칩반도체 청주공장 백혈병 사망노동자 김진기씨 관련 역학조사에서 삼성전자 건강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는 김수근 교수를 사측 추천 전문가로 참여시켰다. 반면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난소암 사망노동자 이은주씨의 작업환경에 대한 역학조사에서는, 유족측 추천 전문가를 참여(현장조사 입회 등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 “역학조사 과정에서 외부추천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것은 가능하지만, 조사반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이해관계자의 배제라는 측면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사업주가 직간접적으로 현장조사에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연구원이 ‘이해관계자의 배제’라는 형식논리를 앞세워 노동자의 실질적인 참여권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는 국립연구원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조사를 받아야 할 당사자인 사업주에게 역학조사 참여권을 보장하고 있는 운영지침을 삭제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공정성이 유지된다.

특히 작업환경측정 등 역학조사 일정을 사업주에게 미리 알리는 관행은 시급히 개선해야 할 대목이다. 현재 역학조사는 ‘불시조사’의 방식이 아니라, 사전에 사업주의 협조를 구하고 미리 약속한 날짜에 출장을 나가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장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작업환경측정도 같은 방식으로 실시된다. 작업환경의 유해성이 현저히 저평가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용자들은 정기적인 작업환경측정이나 직업성질환 역학조사를 위한 작업환경측정이 나오면 평소 사용하던 독성물질을 감추고, 작업물량을 줄이고, 평소 생산성 때문에 해제해 둔 안전장치를 제대로 갖추고, 유해물질 노출이 많은 쪽보다 적은 쪽에서 측정이 이뤄지도록 대비하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 실제로 몇 년 전 돌연사와 백혈병 등이 집단적으로 발생해 역학조사를 실시했던 H타이어에서 역학조사에 대비하라는 내용의 내부문건이 발견되기도 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역학조사가 이뤄지려면, 역학조사기관이 사전에 사업주의 협조를 구하고 미리 약속한 날짜에 출장을 나가 조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불시 조사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관련 법·제도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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