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명랑만화의 주인공이었던 둘리가 성인으로 성장했다면 어떤 모습일까. 최규석(36·사진) 작가는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통해 프레스기에 손가락이 잘린 이주노동자로 성장한 둘리를 그려 파란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다큐멘터리 만화 계간지 '사람 사는 이야기' 를 통해 민주노총 법률원과 삼화고속 노동자들의 사연을 연재하고 있다. 이들 작품에는 노동자들의 고통스럽고 비루한 일상이 노골적인 대사와 그림으로 담겨 있다. 은유도 없고 비유도 없다. 그런데 희한하게 재미있다.

최규석 작가는 지난 19일 저녁 인천 부평구의 한 카페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으면서 지루하지 않은 작품을 그리고 싶다"며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에 대한 장편만화를 그려 보고 싶다"고 말했다.

만화계에서는 최규석 작가를 오세영·박홍용·이희재 작가의 계보를 잇는 리얼리즘 만화가로 분류한다. 그런데 그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사회문제를 재미있게 전하는 대중 만화가"로 자신을 소개했다.

최 작가는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100도씨> 등을 통해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 발생하는 불공정한 사건의 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는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공동체를 위한 사회정의를 유지하는 데 윤리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것에서 만화소재를 찾는다"며 "통속적이고 단순한 캐릭터를 통해 복잡한 사회의 이면을 보여 주고 싶다"고 말했다.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은 노동문제로 이어졌다. 이랜드 비정규직 파업현장과 희망버스 현장, 대한문 앞 분향소 등 노동분규 현장에 가면 수첩을 들고 있는 그를 종종 만날 수 있다. 최 작가는 "쌍용자동차를 비롯해 에스제이엠(SJM)과 만도의 직장폐쇄·용역폭력 등에서 보듯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노동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된 경찰에 의해 맞아도 되는 노동자들이 비시민으로 분류돼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을 '없는 존재'로 외면하는 잘못된 관행에 대해 항상 딴죽을 건다. 만화작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 최 작가의 삶 또한 비주류였다. 자신의 가족을 취재한 <대한민국 원주민>을 보면 오빠를 위해 진학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했던 누나, 술만 마시면 아내를 패는 아저씨, 돈이 없어 띄어쓰지 않고 공책을 채우다 혼난 사건 등을 통해 현대사가 지나간다.

최 작가가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호출한 이유는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이들을 그냥 묻어 두고 가기가 서러워서"였다. 그가 노동의 문제를 일상의 문제로 느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이른바 공순이·공돌이로 불리는 노동자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최 작가는 "사회정의를 위해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는 투쟁의 정점에 노동운동이 있는 것 같다"며 "노동활동가들과 노동운동에 대해 사회가 가진 선입견을 깨뜨리고 노동운동이 사회에 왜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재미난 노동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했다.

"구린 노조조끼가 제 만화로 인해 멋있어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노동운동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조금이라도 깨뜨려야죠. 자식들이 부모에게 '우리 집에는 왜 노조조끼가 없냐'고 물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최근 그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매년 발간하는 인권만화 모음집에 수록될 단편만화를 그리고 있다. 주제는 공권력의 폭력이다. 최 작가는 "일상적 공간에서였다면 사회적 공분을 살 만한 수준의 폭력이 철거민이나 노조를 상대로 일어나면 큰 반향 없이 잊혀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내부 사정을 따지기 전에 폭력에 놀라는 감수성이 가장 필요하다는 얘기를 담아내고 싶다"고 전했다. 책은 11월께 발간될 예정이다.

그의 필명은 '모과'다. 모과나무는 곧게 자라지 못해 목재로 쓰지 못한다. 최 작가는 "한국사회는 사람을 보고 어디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데, 어디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싫었다"며 "저를 아무 데도 쓸 수 없게 만들어야겠다는 의미로 필명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최 작가의 만화는 현재 스페인과 프랑스어판으로 출간되는 등 예술성과 재미를 겸비한 작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는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 전개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지 않고 당사자들의 시선으로 문제를 드러내는 영국 영화감독 켄로치를 닮고 싶다"며 "지금은 독자들에게 읽히는 만화를 계속 그리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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