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우리 노동법은 노동자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노동정책은 이들 법률을 근거로 펼쳐진다. ‘비정규법’ 또는 ‘기간제법’이라 불리는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법과 정책이 본래의 목적에 다가가지 못하면 없애 버리거나 바꿔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에 속한다.

며칠 전 고용노동부는 ‘고용형태별 근로자 패널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기간제 노동자의 이동경로와 근무형태가 어떻게 이뤄지고 변화했는지를 보려는 것이었다. 요지는 이랬다. “법 적용대상자 10명 중 1명(9.9%) 만이 정규직으로 전환됐고 고용은 보장받았지만 임금·복지·승진 등에서 차별받는 무기계약직 전환자가 10명중 3명(31.2%)에 이른다. 또한 직장을 그만둔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회사를 떠났다.”

현재의 기간제법은 시행 5년째다. 원래는 비정규직으로 1년 이상 일하면 정규직 노동자로 인정한다는 고용의제 조항을 두고 있었다. 그것을 노동계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2년 이상 일하면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정규직)로 본다’고 바꿨다. 그 비정규 노동자 보호법과 정책의 성적표가 이번 조사 결과다. 당초 설정했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차별완화라는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아직 시행 초기이므로 더 봐야 한다는 주장도 벌써 5년의 세월이 지나 설 땅이 없다. 한때 정부가 100만 실업대란설을 내세워 현행법마저 개정하려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지만, 지금도 기간연장을 주장하는 쪽에게는 이번 조사 결과는 꽤 충격이 클 것이다.

비정규 노동자는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60%에서 절반 수준으로 10여년 동안 고착돼 오고 있다. 비정규 노동자 문제가 소득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 그리고 내수침체로 인한 경제불안의 원천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성 파괴의 중대한 경로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로 설정된 지는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 역대 정권 모두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해 왔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지지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살리기의 기세에 밀린 탓이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부의 정책이 비정규직 노동문제의 해결보다 대량실업의 공포로부터의 해방에 우선순위가 주어졌던 데서 비롯되고 있다. 곧 고용의 안정성이나 임금 등 노동조건의 적정성이 어떻든 일자리를 많이 만들거나 붙잡고 있게 해야 한다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춘 결과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 정권이든 실업문제의 해결을 노동정책의 최우선순위에 둔 것은 정치위기의 폭발성에 비춰 이해할 만하다. 우리의 경우 외환위기 이후 이런 경향은 크게 두드러졌다. 경제위기가 언제 터질지 모르고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경제현상이 쉽사리 타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득이나 노동조건이 열악한 일자리라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정책논리가 힘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 정책기제인 노동의 유연화, 특히 수량적 유연화가 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자본과 권력이 강조해 마지 않는 일자리 만들기 주장의 논거는 여기서 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완화론의 근거 또한 여기에 있다. 곧 산업구조의 변화나 급속한 기술혁신이 진전되는 상황에서 비정규 노동자의 증가는 막을 수 없는 추세로 인정하고, 따라서 2차적인 문제로 발생하는 차별을 완화하면 된다는 발상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발생 원천인 ‘사용사유’ 차단보다는 ‘기간제한’쪽으로 법률을 정한 것이고, 노동위원회에 대한 차별시정 신청권을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안겨 줌으로써 저항을 완화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차별시정 신청건수는 극히 저조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조에게 차별시정 신청권을 주거나 신청기간을 늘리는 따위의 방책을 검토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 조치로 시정 신청이 다소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노동자가 시정 판정의 요건을 갖춰 내기가 쉽지 않다. 재계약이나 정규직 전환은 고사하고 현재의 일자리라도 지켜 낼 수 있는 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선이 100일도 남지 않는 시점에서 모든 후보가 일자리 만들기를 가장 중요한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사회보장이 시원찮은 상황에서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주장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처럼 노동의 유연화라는 자본의 요구에 부응해 어떤 일자리든 많이만 만들면 된다는 식의 일자리 만능론으로는 자본의 탐욕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복지나 경제민주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일자리 정책이 자리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사용사유의 엄격한 제한과 괜찮은 일자리, 질 좋은 일자리 창출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아울러 비정규직 증가의 원천으로 대두되는 정리해고의 규제, 사내하청·파견제의 사용자 개념과 특수고용직에 대한 노동자 개념의 확대도 총체적인 비정규직 노동문제 해결의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leewb45@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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