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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증의 일상화
이주현 변호사

신림동 고시생이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작은 접촉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차를 운전하고 계셨는데, 갑자기 차 뒤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순간 고개를 돌려 뒤를 봤더니, 상대방 차가 차선에 비스듬히 걸쳐진 채 우리 차를 들이받은 상태였다. 차들이 합류하는 길목이라 우리 뒤로 끼어들려다 일어난 사고 같았다. 상대방 운전자는 다짜고짜 화를 내며 경찰에 전화를 하더니 도착한 경찰들에게 어머니가 운전미숙이라 사고가 났다며 어이없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해서 상대방의 말을 자르며 경찰관에게 “뒤에서 우리 차를 박았을 때 제가 바로 뒤돌아봤는데, 저 차가 차선에 비스듬히 걸쳐 있었어요”라고 했더니, 경찰관은 한마디로 내 말을 잘라 버렸다. “아, 그럼 사진을 찍지 그러셨어요.”

이제 변호사 일을 시작한 지 9개월째 접어드는 초보 변호사인데도, 그때 그리 야속하기만 하던 경찰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상담하러 오시는 분들에게 “그래서 서류로 남아 있는 게 있나요” 말하기 일쑤이고, 증거가 부족해 지금의 상태로 형사고소를 진행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답변도 종종 하게 된다. 채증의 중요성, ‘채증의 일상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실제로 상담 중에는 채증된 것이 없어 안타까운 사건도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모든 근로자들이 통행로로 사용하는 곳으로 평상시처럼 걸어가다 사고를 당한 사건이었다. 적재돼 있는 철제 빔을 피하려다 재해를 입게 된 것인데, 사고장소는 출입금지 표지판 등 어떠한 표시도 없는 곳이었다. 재해 발생 직후 회사 안전팀에서는 출입접근 방지용 위험 간판을 비치하고, 이를 확인하는 내용의 진술서를 다른 근로자들에게 받기 시작했다. 조사가 시작되자 회사측은 전에 없던 ‘안전 동선’을 그려 제출하는가 하면, 재해 발생 당시 그 장소를 출입금지 안내 표지판 및 안전판으로 막아 놓은 상태였다며 사진을 제출했다. 또 표지판을 근로자가 임의로 치우고 이동하던 중 발생한 재해였다고 주장하며, 근로자의 고의적인 사업주 지시 위반이 재해의 원인이라 몰아갔다.

재해 당시 부상을 입고 응급실로 호송되던 자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재해 발생 그 다음날에라도, 가족을 시켜서라도 재해가 발생한 현장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더라면, 같이 일하던 근로자들에게 진술서라도 받아 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조된 증거를 들이밀고 허위 주장으로 일관하며 매뉴얼대로 재해에 대응하는 회사와 싸우기에는, 채증된 자료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건물이 점점 외관을 갖춰 가면서, 증거를 모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사라져만 갔다.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소송은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아니다. 소송에 제출된 자료를 가지고 판단을 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소송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한계로 인한 억울함과 서글픔 때문에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상담을 하고도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가벼운 접촉사고에도 당황해서 사진 찍을 정신 없던 내가, 지금은 서면으로,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남겨 놓은 것이 없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불편하지만, 남겨 놓은 자료가 있어야 소송에서 다툴 여지가 생기고, 승소할 확률이 커진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채증은 일상이 돼야 한다. 사진과 동영상과 서면과 녹음에 익숙해져야 한다. 건물 지하나 영화관에 들어가면 비상구 위치를 확인해 두는 것처럼,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사진 촬영과 동영상 촬영, 녹음이 가능하도록 휴대폰·각종 기기들과 친해져야 한다. 소송에서 우리가 유리해질 방법은 스스로 ‘자료’를 만드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이주현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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