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올해 한국지엠 임금·단체협상 잠정합의안은 지난달 17일 조합원총회에서 찬성률 18%로 부결됐다. 금속노조 대공장에서 30~40%대 찬성률은 종종 있어 왔다. 하지만 10%대 찬성률은 이번이 처음으로 보인다. 조합원 자격은 있지만 회사 쪽으로 좀 더 가 있는 기능직 관리자들과 사측 친화적인 대의원 등이 동원하는 찬성표가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잠정합의안이 부결되는 경우에도 40%대를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지엠의 82% 반대율은 역설적으로 지난 시기 회사측에 섰던 조합원들 대부분이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 한국지엠에서는 사측 노무관리도, 노조의 관성적 타협도 설 자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조합원 대부분은 몇 푼의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한국지엠 노사관계의 질적 변화를 바라고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2001년 대규모 정리해고와 매각 이후 10년 넘게 고용불안과 사측의 농간에 짓눌려 왔던 현장을 바꾸자는 것이다. 압도적 반대를 표한 한국지엠 조합원들은 7월4일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는 96%라는 압도적 찬성표를 던졌다. 조합원들의 뜻은 명확하다.

올해 한국지엠 임단협의 최고 쟁점이었던 주간연속 2교대제는 시범실시를 못 박았다는 점에서 공전되던 논의를 한걸음 진전시켰다. 그러나 시행시기와 방식이 정해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 큰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무직 차별철폐 역시 올해 첫 사무직 임단협 교섭에서 임금체계 개선에 관한 기구를 만들어 이후 투쟁의 징검다리를 놓았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 물론 십수 년간 차별을 받아 온 사무직 조합원들의 기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쨌건 성과와 한계가 분명했던 올해 한국지엠의 임단협 잠정합의안은 매우 큰 반대로 부결됐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조합원들은 지난해 10월 현장 내 소수파이자 투쟁파를 자처했던 현 집행부에게 표를 몰아줘 당선시켰다. 올해 초 집행부와 교육위원회는 전 조합원 의무교육으로 ‘쫄지마! GM의 숨겨진 꼼수’라는 제목의 자신감 배양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지부는 임단협 이전부터 한국지엠의 수익성이 아니라 글로벌 GM에서 한국지엠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전체 GM 차의 30%는 한국지엠을 경유해 만들어진다)에 맞게 조합원들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젊은 지부장은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투쟁을 벌이겠다고 이야기해 왔다. 매각 이후 10년간 매번 물량축소·공장 철수·정리해고에 불안해하며 제대로 된 파업 한 번 못해 본 한국지엠의 노동운동을 크게 바꾸자는 일관된 흐름이었다.

잠정합의안 부결 이후 현재 집행부와 조합원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흐름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한 전략이다.

사실 현장 간부들의 힘과 집행력이 크게 약화돼 있는 한국지엠에서 한두 번의 임단투로 획기적인 반전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다. 노동자의 임금·노동조건은 궁극적으로 노사 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더군다나 한국지엠의 노동자들은 바지사장이 아니라 글로벌기업 GM을 상대해야 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알다시피 한국지엠은 GM의 여러 공장 중 하나가 아니라 GM의 주력 브랜드인 쉐보레 승용차의 절반 가량을 책임지고 있다. 북미·남미·중국·동유럽의 10여개 공장 가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소형차 전략기지다. 노조의 조직력과 자신감이 있다면 더 많은 것을 쟁취할 수 있는 위치다. 하지만 동시에 생산과 조직관리에 변화를 주는 큰 사항은 본사에서 더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동시간의 전면적 변화인 주간연속 2교대제나 임금체계 변경은 그만큼 맞대결을 요구한다.

따라서 ‘모 아니면 도’ 식의 판단보다는 이번 임단협이 한국지엠 노동운동의 부활을 위해 어떻게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주간연속 2교대제와 사무직 차별철폐가 이번에 모두 해결될 수 없다면 다음 단계 투쟁을 위해 올해 마무리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현장의 투쟁과 소통·토론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잠정합의안 도출 과정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이 현장토론 없이 느닷없이 적당한 안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더라도 철저한 현장토론 속에서 합의안을 만들어야 한다. 이번 82%의 반대표는 단순히 합의안이 부족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난 10년여간 고용불안에 짓눌렸던 조합원들이 다시 한 번 한국지엠의 주체로 서려 했으나 이것이 다시 부정됐다는 의사표시다.

조만간 사측은 유언비어를 유포하며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회사의 고용위기 선동을 넘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집행부는 교섭석상이 아니라 조합원 속에서 해법을 찾고, 조합원들은 한국지엠 노동운동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임단협을 진행한 한국지엠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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