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민주통합당 후보 경선도 중반에 접어들어 3개월여 남은 대선을 둔 경쟁이 점차 치열해지고 있다. 이제 어느 정당의 누가 집권하든 사회복지와 경제민주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가 됐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 실제 내용일 것이다. 노동자와 민중을 위한 정책들을 집권과 기득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노동자와 민중을 동원과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을 오랜 역사를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내용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화두가 되는 것은 정치적 민주화가 공고화되는 단계에 접어든 상황에서 가능해졌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모두 생산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생산현장뿐만 아니라 생산현장 바깥의 사회에서도 정당하게 대우하는 ‘생산의 민주화’를 통하지 않고는 올바로 달성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이 구조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대의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의회는 입법과 행정부 견제가 핵심 업무이므로 긴급한 일상적 접근을 요하는 임금·노동조건 및 인플레이션 등 사회경제적 사안들의 많은 부분을 다루지 못한다. 의회의 결정은 정당들 간 타협을 통해 오랜 논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사안들의 세부 내용들은 법으로 정할 문제가 아닐뿐더러 사회계층을 대변하는 이념정당 체제가 아닌 한 정당들의 타협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때문에 이 문제들의 일차적 이해당사자인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가 제도화돼야 한다.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고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거쳐 생산의 민주화를 제도화시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구체적 예가 코포라티즘이라고 불리는 노동자 참여정치다. 코포라티즘이 가장 강력한 나라로 알려져 있는 스웨덴·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연금과 금융정책 등에서도 노동자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코포라티즘이 가장 약한 나라로 알려진 이탈리아도 노사정협의회를 통해 임금 및 노동조건과 인플레이션 문제를 결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나라에서 노사정 간 협의사항은 구속력을 가지고 국가정책에 반영된다.

우리나라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노사정위원회(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노사정위원회는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정리해고제 도입과 민영화를 위한 ‘강제된 합의’를 도출해 합의의 정치를 억압과 배제의 정치에 종속시키거나 의결과정을 악화시켜 사실상 무의미한 기구로 전락했다. 이명박 정부에 와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이 과소 대표되는 반면 자본은 과대 대표되는 상태에서 사실상 개점휴업과 정책적 불임기구와 다를 바 없게 됐다.

지난 총선과 올 대선을 앞두고 노동계 및 진보적 학술단체에서 노동 관련 정책 대안을 이미 내놓았다. 그 집대성의 결과가 학술단체협의회가 기획한 <217, 한국 사회를 바꿀 진보적 정책 대안>이다. 전문가들은 이 단행본에서 각각 최저임금·청년 실업·이주노동자·노동조합·비정규직 노동으로 나눠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책 대안들을 제시했다. 이 정책 대안들을 꾸준하고 강력하게 요구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이 대안들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요건을 갖추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 구체적 해결 방식이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에서 봤듯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오정위원회’ 같은 노사정위원회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의사결정과 정책집행에 모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구속력을 갖춘 진정한 삼자협의기구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기존의 노사정위원회를 되살리는 것으로는 어림없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기구 구성과 정책 논의 모두를 공백상태(tabula rasa)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byungkee@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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