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 경기지부
교선부장

한국 기업들은 장시간노동 관행을 통한 수탈형 노동력 이용방식과 요소투입 중심형 생산체제를 장기간 온존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노동시간 양극화, 노동력 배분의 불평등이 초래된다. 연간 3천500시간을 넘게 일하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실업과 불안정고용으로 고통 받는 전체 절반이 훨씬 넘는 노동자가 있다. 한쪽의 장시간노동과 또 한쪽의 실업 또는 불안정고용이 공존하는 풍경은 한국사회 노동체제의 후진성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에서 벌어지는 심야노동 해소를 위한 교대제 개편 논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기회로 여겨졌으나, 몇 년째 공전만 거듭하면서 한국 사회에 긍정적 충격을 가져다줄 기회를 놓치게 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노동시간단축과 고용의 영역에서 우리가 되새겨 볼 일은 무엇이고, 단기적이고 현실적인 우려를 넘어 노동시간체제의 새로운 전망을 가져올 방법은 무엇일까. <매일노동뉴스>가 4회에 걸쳐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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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 순서]

1. 노동시간단축과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교대제 개편방안
(박근태 전 금속노조 부위원장)

2. 현장에서 바라본 교대제 개편의 가능성과 노동시간단축의 의미
(조건준 금속노조 경기지부 교선부장)


3. 교대제 개편과 노동시간단축의 고용효과와 사회경제적 효과
(김성희 고려대 연구교수)

4. 교대제 개편의 서구 사례와 한국에 주는 함의
(이상호 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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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영도계급에서 왕따 계급으로

이젠 추억에 불과하지만 1980년대에 수많은 학생운동권이 노동현장으로 위장취업까지 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고 했다. 지금, 노동문제는 말로는 떠들지만 실제는 찬밥신세다. 복지논쟁에서도 늘 "노동이 빠진 복지"에 대한 지적이 후순위처럼 따라다닌다. 촛불이 거리를 휩쓸 때도, 선거정치가 벌어지는 현재에도 노동은 왕따다. 만시지탄의 공격대상이 되기 전 통합진보당에서 노동이 배제됐다는 얘기들은 넘치고 흘렀다. 노조 조직률은 10%를 오간다. 왜 이럴까.

고용빙하기의 공포가 휩쓸어 버린 노동사회

학자들의 얘기처럼, 87년 체제는 97년 체제에 의해 무대 뒤로 퇴장했다.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고용빙하기는 공포로 시작됐고, 실업의 공포는 내면화됐다. 98년 조각배가 아닌 항공모함쯤으로 여기던 대기업에도 해고의 칼바람이 불었다. 정리해고는 누구나 잘릴 수 있고 평생고용은 없다며 실업의 공포를 확산시키는 테러효과를 보여 줬다.

사회의 모든 화두는 일자리로 모아졌다. 일자리 창출을 떠들고 이를 위해 성장론이 한껏 꽃피었다. 메이데이에 외치던 “우리도 쉬고 싶다”는 구호는 “일하고 싶다”는 노동에 대한 욕망으로 바뀌었다. 취업경쟁은 조기교육열풍으로 철저하게 뿌리내렸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었습니다.” 2005년 기아자동차 입사비리로 수사를 받은 한 노동자의 얘기처럼, 취업을 위해 영혼이라도 팔아야 하고 고용을 지키기 위해 영혼을 파는 세상이다. 해고의 심각성을 고발하기 위해 “해고는 살인이다”고 외치지만 고용과 생명을 동일하게 취급할 정도로 해고공포가 만연하다.

“한 달만 편히 휴가를 다녀오라고 해도 내 자리가 없어질까 봐 쉴 수가 없습니다.” 민주노조의 현장에서도 공포를 확인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베짱이의 여유가 없다. 잠시 쉬는 것도 개미에겐 공포다.

공포가 낳은 효과 '도피'

<당신과 나의 전쟁>, <저 달이 차기 전에>를 비롯해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는 수많은 장면들이 영상으로 퍼진다. 분노와 저항을 기대하지만 ‘개미의 공포’만 일깨운다. “당신의 고용불안이 나의 고용안전”인데 일중독과 일부족,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분열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내 고용이 중요한데 다 잡소리가 아닌가. “노동자 자본가 사이엔 결코 평화란 없다.” 이따위 노동가는 헛소리다. 현실에서는 ‘노사고용동맹’이 튼튼하다. 오히려 확산되고 있다. 내 고용만 보장된다면 회사에 잘 협조한다. 이 고용동맹의 외부에 있는 비정규직이 떠들면 먼저 달려가 때려주기까지 한다. ‘의자놀이’가 뭔 잘못인가.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이 요구하는 규범이 아니던가.

기업권력의 18번 ‘예외상태’

해고의 공포가 만들어 준 절호의 찬스를 자본은 즐기기 시작했다. 근로제공을 거부하는 직장폐쇄는 실업의 공포를 자극한다. 직장이 폐쇄돼 임금도 받지 못하고 혹시 잘릴까 봐 회사에 고개 숙이고 노조를 탈퇴한다. 사례들은 이어지고 있다. 발레오·상신브레이크·유성기업·만도…. “살짝 찌르니까 푹 들어갔다.” 2009년 노조를 깨려고 직장폐쇄를 했던 경영자가 했던 말이다. “훅 부니까 확 날라갔다.” 2012년 직장폐쇄로 민주노조를 한방에 무너뜨린 경영자가 얘기했다. 무릇 지배하기 어려울 때는 예외상태를 만들어 공포를 통해 통제하는 법이다. 노동사회에 부는 예외상태의 활용은 올해 7월27일 경기도에 있는 SJM의 '야만의 새벽'으로 이어지고 있다.

진보적 노동부, 진부한 노동운동?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해 11월부터 노동시간단축 전도사를 자처했다. 야간노동을 없애자는 주간연속 2교대제가 10년 이상 지지부진하고, 노조와 조합원 누구도 불법적인 장시간 노동에 대해 고발하지 못했는데, 노동부는 현대차와 기아차 사장을 고발했다.

노동운동은 낡아빠진 프레임에서 한 발도 나서지 못했다. 노동시간 줄이면 임금이 줄어들 것이라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심리에 밀려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회사는 노동시간이 줄면 생산이 줄어드니 임금 깎이지 않으려면 노동강도를 높여 생산량을 맞추라고 했다. 10년 동안 이 쳇바퀴 안에서 헤맸다. “노동시간을 줄여도 노동강도를 높이면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그러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의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것에 대해 걱정할 뿐이었다.

오히려 노동부가 노동시간단축 이슈를 선도한 것이다. 노조는 뒤따라가는 수준임을 부정할 수 있는가. 진보정당이든 노조는 노동시간단축의 이슈를 잃어버렸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야당 대선주자의 표현에 비해 구린내 풀풀 나는 “임금 한 푼 더” 콘셉트를 벗어나지 못했다.

'똑똑한 노동' 할래, '멍청한 노동' 할래

자본주의 초기의 기업내부 노동시장이 취약했던 시절에는 도급이 횡행했다. 대량생산과 함께 도급제는 중간착취라며 국가에서 기업내부노동시장을 키우던 시절도 있었다. 비용이 증가하자 기업조직을 아웃소싱을 통해 외부의 노동시장을 키웠고, 그 결과 하청과 비정규직이 증대했다. 그럼 이후의 노동시장은 어떻게 바뀔까.

첫째, 다시 기업내부 노동시장을 강화해 정규직을 늘리던 수십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둘째, 현재 상황이 유지되거나 오히려 하청과 외부노동시장을 확대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니 이렇게 가진 않을 것 같다. 셋째, 유연성을 유지하면서 차별성은 완화하는 쪽으로 가는 길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줄이고 직접계약을 늘리지만 전일제 근무를 하지 않는 방식이다. 매일 같은 시간만큼 일하는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선택적 근무를 하는 '스마트워킹'을 이미 삼성 등에서 떠들기 시작했다. 한국자본주의는 저성장기에 돌입했고, 세계경제가 휘청이는 상황에서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미친소리다. 그래서 있는 일자리를 흔들어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노동부도 노동시간단축 전도사 행세를 했다. 과거 10여년이 ‘유연성과 경직성’의 싸움이었다면 이제 프레임은 ‘똑똑한 노동 할래, 멍청한 노동 할래’로 바뀌지 않을까. 이 프레임을 넘어설 대안적 프레임은 과연 있는가.

베짱이의 권리를 외치자!

임신과 육아 때문에 스마트워킹을 하자는 그럴싸한 얘기는 또다시 비수가 돼 날아올 수 있다. 정규직을 언제든 공격해서 실업의 공포를 불어넣고, 전일제 노동자를 정리해고가 아닌 시간제 노동으로 돌리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는 청년실업자가, 오후에는 정년퇴직자가 일하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만들자고 하면 정규직이 아무리 저항해도 사회적 지지는 높을 것 같다. 노동시간을 과감하게 줄여 가지 않는다면, 앞으로 미래의 10여년은 전일제 노동과 단시간 노동의 무수한 형태들 속으로 노동계급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개미의 공포를 벗어나려면 놀고 즐기는 베짱이의 외침이 필요하다. 노동사회에서 여가사회로 중심을 옮겨야 한다. 이를 위한 정책들은 지면상 생략한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자본만이 사유화된 것이 아니라 노동 자체가 사유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취업비리가 노조 안에서 벌어진 지 오래다. 자기 일자리를 위해 비정규직의 정규직을 거부하는 상황이다. 노동까지 사유화되는 현실이다. 절박함에도 최대한 자제해서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당신의 장시간 노동, 누군가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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