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
철폐연대
상임활동가

글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뮤지션·만화가·영화인들은 무엇을 하는 이들인가. 모두가 문화예술 창작자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문화예술인들이 ‘노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였다. 지난 10일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에서 주최한 ‘문화예술노동자 불만집담회’ 자리였다. 열심히 일해도 불안한 인생, 자기 창작물의 저작권이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상황, 더 나은 창작을 위해 투자해야 할 시간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뛰어다녀야 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노동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더 좋은 예술을 위해 더 나은 노동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였다.

문화예술은 배고픈 직업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문화예술은 거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산업이다. 그 많은 이윤이 창출되는데 문화예술인들이 여전히 배가 고픈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들의 매출은 날로 늘어 가는데, 출판사의 몫은 점점 작아지고 동시에 작가들의 몫도 작아지고 있다. 인세가 10년 전과 지금이 똑같거나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영화를 만들어도 극장이 가장 높은 비율로 수익을 챙겨 가기 때문에 가장 약한 위치인 영화스태프들은 가난에 허덕인다. 온라인 음악시장에서도 이동통신사들이 50% 이상의 비용을 가져가는데, 막상 음원을 등록한 창작자들은 다운로드를 할 때마다 몇 원씩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예술인들에게 “당신들의 직업은 배고프다”고 말하는 것은 기형적인 구조를 가리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문화예술인들은 불안정한 노동자들이다. 단기간 계약이 대부분이다 보니 일감이 언제 떨어질지 몰라서 전전긍긍한다. 짧은 시간 높은 노동강도로 일하고 심야노동도 다반사다. 그러다가 일감이 떨어지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서 고통 받는다. 그러다 보니 예술을 하기 위해 또 다른 불안정노동(아르바이트)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도 제대로 갖지 못한다. 출판사들은 글작가나 그림작가들에게 양도계약서를 통해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하도록 요구한다. 그 창작물이 영화가 되기도 하고 팬시상품으로 팔리기도 하는데 정작 그 창작물을 만든 작가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일이 지속된다. 몇몇 잘나가는 이들을 제외하고 대다수 개별 문화예술인들은 출판사나 제작사·음반회사, 음악을 유통시키는 회사와의 관계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기에 자기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잘나가는 문화예술인들이 있다는 이유로 대다수 문화예술노동자들에게 현실에 순응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문화예술이 승자독식구조여서는 안 된다.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예술이 나오기도 하지만, 더 많은 문화예술이 각각의 빛깔과 향기로 빛나고 있어야 한다. 그 저변을 넓히는 역할을 정부가 해야 한다. 정부는 문화정책을 통해 더 많은 문화예술 창작품이 만들어지고 다양해지고 그것의 유통망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도록 해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문화예술인들이 자신의 노동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보조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정부의 문화정책이 문화예술가의 경쟁을 부추기고 돈이 되는 곳에 투자하는 상업논리를 따르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의 죽음 이후에 문화예술노동자들의 힘들고 어려운 삶이 알려지자 산재보험 적용과 문화복지재단 설립을 뼈대로 하는 ‘예술인복지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올해 11월부터 시행이 된다. 그런데 그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선의 문화예술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생활의 불안정함을 보완하기 위해 문화예술노동자들이 강력하게 희망했던 고용보험 적용은 고용노동부의 반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화가나 작가 등은 노동자성 일부 인정을 거부한 정부의 반대로 예술인복지법 대상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정부는 노동자로서 예술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 바람에 예술인복지법은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언적 내용만 잔뜩 담긴 법이 됐다.

노동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돼 왔던 문화예술계에 이제는 ‘노동’이 더 많이 이야기돼야 한다. 문화예술을 만들기 위해 노동하는 이들의 삶이 안정되고 권리가 보장돼야 문화예술의 저변도 넓어지고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문화예술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을 ‘노동자’로 호명하고 개별이 아닌 집단적인 힘으로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개별들의 경쟁을 넘어 더 넓고 깊은 창작을 위해, 그리고 그렇게 풍성한 창작을 통해 이 땅의 많은 노동자들이 문화예술을 자신의 것으로 향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문화예술노동자들은 이제 뭉쳐서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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