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 순간이 응급상황이었다." 남편의 암 투병시절 얘기를 전하던 정애정씨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정기훈 기자

지난해 7월 장대비가 내리던 밤,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소란이 일었다. 공단 이사장실 앞에서 농성을 벌였던 이들이 농성장에서 쫓겨난 것에 항의를 하는 소리였다.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의 산업재해를 인정한 그해 6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에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하겠다고 밝히자 분노한 유족과 피해자들이 공단으로 몰려간 것이다. 정애정(34·사진)씨는 공단 앞마당에 주저앉아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정씨는 공단 직원들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쫓겨난 이들을 비웃는 것을 보고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정씨는 스물아홉살 젊디젊은 시절,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 황민웅씨를 급성 림프구성백혈병으로 떠나보냈다. 올해 여덟살이 된 둘째를 뱃속에 둔 채 9개월 동안 남편을 간병했다. 너무 힘들어 매일 눈물을 흘렸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심장이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부른 배를 안고 그렇게 힘들게 돌봤지만 남편은 골수이식 수술을 보름 남기고 숨을 거뒀다. 2005년 7월23일이었다.

그리고 7년이 흘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2살이던 큰아이는 똘똘해 보이는 안경잡이 초등 3년생이 됐고, 뱃속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로 자랐다. 그 사이 엄마 정씨는 투사가 됐다. 지난 27일 <매일노동뉴스>가 정애정씨를 경기도 시흥시 그의 집에서 만났다.

정씨는 삼성전자에서 11년을 일했다. 7년을 일한 남편 황씨보다 빨리 입사했다. 군산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꿈의 공장’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삼성을 목표를 삼았다. 열아홉 살에 만난 세상은 온통 새것이었다. 정씨는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도, 걱정도 있는 반면에 진짜 독립하는 것 같은, 어른스러운 것 같은 느낌이 겹쳤다”며 “설레었다”고 말했다. 노트에 날짜를 적어 가며 카운트다운하듯이 떠날 날짜를 셌다.

그런데 입사하기 전 삼성과 이후 삼성은 달랐다. 라인에 투입되고 나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배울 것, 익힐 것이 넘쳤다. 영어로 표기된 반도체용어는 의학용어처럼 어려웠다. 공구 하나, 작업매뉴얼까지 영어였다. 몰라도 아는 척하는 일이 많았다. 사수 언니한테 혼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당시는 작업자들이 신입사원을 하나하나 가르쳤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구를 돌볼 겨를이 있을 리 만무했다.

“95년에 입사했는데 생산물량이 가장 많을 때였어요. 디램을 만들기만 하면 팔렸죠. 사수도 바쁘고 나도 눈치 안 보려면 내 몫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작업절차를 익히느라 호기심이나 다른 의문점은 언감생심 물어볼 수나 있었겠어요?”

입사한 지 3년 만에 닥친 외환위기는 회사를 더욱 삭막하게 만들어 버렸다. 교대근무가 상의 없이 수시로 바뀌었다. 4조3교대 근무는 4조2교대가 됐다가 다시 3조3교대로 변경됐다.

“야간근무가 진짜 힘들 거든요. 보통 6일 일하고 이틀 쉬어야 하는데, 맞교대를 할 때는 야간근무를 열흘 하고 하루 쉽니다. 다음날 아침근무 들어가는데 그러면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출근하게 돼요. 처음에는 몇 개월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1년을 했어요. 원래 협상을 하는 줄은 전혀 몰랐죠. 시간외 근무도 특근도 하라고 하면 하는 겁니다. 일개 사원이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노조도 산재도 몰랐다. 남편이 백혈병으로 쓰러졌는데도, 정씨는 단 한 번도 업무 때문에 병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남편과 결혼해 3년을 살았고, 죽은 뒤 5년을 싸운 그의 얘기는 이렇다.

- 기흥공장에서 백혈병이 많이 발생했다. 그런 조짐이 있었나.

“애기아빠가 그렇게 되기 전에는 몰랐다. 누가 아파서 병원을 가는지, 산재를 내는지 몰랐다. 산재라는 용어를 들어보지도 못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생리불순이라든지 하혈, 코피 흘리는 것을 늘 봐 왔다. 그걸 환경이나 직업병으로 연관지어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혈을 해도 창피하다고만 생각했다. 남자 선배들 보면 부끄러우니까. 가리고 없애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런 게 조짐인데. 지금 생각하면 생리가 불순하고 열나고 식은땀 나서 힘들다며 나간 애들은 그나마 다행인 거다.”

- 반도체 공장에서 쓰는 화학약품이 100종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는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사원들은 ‘클린(clean) 용액’을 자주 쓴다. 냄새도 비슷하고 휘발성에 벤젠성분이 있는 것 같다. 성분을 분석하고 나서 청소하는 게 아니니까. 나중에 싸우면서 알았는데 우리가 쓴 것이 100% 원액이거나 비슷한 농도였다. 공정을 구분하기 위해 조립식 패널로 칸막이가 쳐져 있다. 그런데 청소를 하려고 나무를 닦으면 색이 변하면서 하얗게 일어났다. 한 달에 한 번을 ‘클린의 날’로 정해 청소를 했는데 파티클(미세먼지) 인다고 나중에는 중단했다. 용액은 작업자들이 수시로 가져다 쓴다. 열쇠도 없고 관리자도 없다. 벤젠성분이 들어갔다는 감광액도 여사원들이 가져다가 액을 체인지했다. 서비스 에어리어에 약품을 넣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가져다 넣으면 된다. 여사원들이 항아리 같이 생긴 용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한다. 빛에 노출되면 안 되니까. 겉은 검은 항암제처럼 갈색으로 돼 있다.”

최근 정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만화책 <먼지 없는 방>이 출간됐다. <먼지 없는 방>은 반도체 공장을 뜻한다. 반도체는 미세먼지에 취약하다. 때문에 먼지나 분진을 없애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먼지가 난다며 ‘똑딱이 볼펜’ 사용을 금지할 정도다. 공장 안에는 특수한 배기시스템이 가동된다. 작업자들은 공정 곳곳을 청소한다. 청소에 쓰는 용액은 반도체 공정에서 쓰는 화학물질의 극히 일부분이다.

- 남편이 아플 당시에는 산재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그때는 산재 직업병 생각을 못했다. 여유도 없었다. 아프다고 큰 병원으로 가 보라고 해서 갔더니 백혈병이라고 해서 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나도 휴직처리하고 병원비 구하러 다녀야 했다. 주위에서 알려 주지도 않았다. 죽고 나서는 서류정리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서류를 정리하고 나니 휴직날짜 끝나서 바로 복직했다. 그런데 교대근무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울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교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1년 과정이었다. 교대근무를 하며 하루 3~4시간 자면서 일했다. 오로지 애들하고 어떻게 살지 그 생각만 했다. 애들을 봐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잠을 못자 힘들었지 내 처지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그때는 애기아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출장을 갔다고 생각했다. 해외출장 2년 갔다고 생각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엄마 노릇을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살았다.”

- 남편의 병이 직업병일 수 있다는 것을 언제 알았나.

“고 황유미씨의 아버님이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이 2007년 말이다. 어느 날 애기아빠 동료한테서 전화가 왔다. 일하다 백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소문이 회사에 돈다며 인터넷에서 한번 찾아보라고 했다. 얼토당토않게 느꼈다. 전화를 짧게 하고 끊었는데 며칠 동안 잠이 안 왔다. 알아보고 다산인권센터에 연락해 활동가들을 만났다. 내가 황상기씨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분들도 반도체 현장을 몰랐다. 내가 2시간 넘게 얘기를 했다. 한동안 내가 해 줄 얘기가 더 많았다. 얘기하다 보니 생각이 정리됐다. 인터뷰도 하고 이러면서 천천히 생각이 정리됐다. 10년 동안 일하면서 겪은 일이 우연이 아니구나, 애기아빠도 일하다 병을 얻을 수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 남편은 어떤 라인에서 일했나.

“5라인과 1라인에서 일했다. 나와 애기아빠는 5라인에서 만났다. 5라인에 있다가 얼마 안 돼 1라인으로 갔다. 셋업(set-up) 멤버였다. 정상가동할 수 있게 라인을 정비하는 일을 했다. 화학약품을 다루는 설비이다 보니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회사는 셋업 기간을 한 달로 잡는데, 작업자들의 말은 달랐다.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데만 몇 개월이 걸렸다. 이 일을 1년6개월 정도했다. 5라인에서도 애기아빠가 했던 공정은 신설라인이었다. 설비가 불안정하니까 정상가동이 안 됐다. 애기아빠 같은 엔지니어들은 설비를 열고 화학약품 근처까지 가서 고쳐야 한다. 사측은 설비 엔지니어 작업을 고상하게 얘기한다. 삼성은 처음에 근로복지공단에 의견서를 접수할 때만 해도 엔지니어들이 6시간은 라인에서 일하고 2시간은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 2월 고용노동부에서 설비엔지니어든 뭐든 공간에 상관없이 라인 안은 다 위험하다고 발표했다. 삼성이 곤란해진 것이다. 공정도 분리를 못하고, 작업도 분리를 못하겠고 하니까 라인에서 쫓아냈다. 추가진술서를 낸 것을 보면 8시간 내내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모니터에 설비에러 표시가 되면 간헐적으로 라인에 투입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 5년 동안 삼성에 대항해 싸운 셈인데.

“이런 방향으로 싸운 사람도, 방어하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존 틀에 짜 맞추려고 했다. ‘기준이 없다, 제도가 없다’ 이런 식으로만 얘기했다. 반도체 산업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었고, 반도체 산업과 백혈병을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도 처음이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례적인 일을 많이 했다. 개인별 역학조사도 했다. 1박2일 항의농성을 하고 역학조사 결과를 받았는데 5장짜리였다. 그런데 삼성에서 받은 애기아빠 신상만 실려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반도체 역학조사라는 게 뻔했다. 통계라는 게 숫자놀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집단을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수치가 달라지는데 역학조사에서는 정상적인 매뉴얼로 작업했을 때를 가정한 뒤 결론을 내렸다.”

- 당신에게 삼성은 무엇인가.

“한이다. 한을 풀고 싶다.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요새는 삼성의 부조리를 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를 탄압하고 학대하는 것, 우습게 아는 것, 돈으로 이 나라 망가뜨리고 있는 것, 정권까지 휘어잡는 것, 환경까지 파괴하는 것은 부조리다.”

- 국회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어떻게 전망하나.

“산재 인정이 될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되면 좋고 안 되도 어쩔 수 없다. 산재 인정은 절차상의 것이다. 대법원에서 졌다고 애기아빠가 직업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직업병이라고 하지 않나. 애기아빠가 직업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리려고 법정 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재 인정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성과는 있다. 삼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바로 보려는 사람들의 시선이 생겼다. 그러니까 국회가 나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론도 관심을 갖고 있다. 노동자들도 많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성에버랜드 외에도 다른 계열사에서 힘을 많이 받고 있다. 백혈병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삼성이 보기보다 완벽한 성벽이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것 같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우리의 권리를 세우려면 노조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을 느낀다. 조만간 어떤 성과가 있을 것이다.”

정씨는 최근 큰아이에게서 놀라운 질문을 들었다. “아빠가 삼성에서 일하다 죽었어요? 백혈병이 뭐예요? 왜 삼성에서 그렇게 많이 죽어요?” 구체적인 질문들이 쏟아졌다. 정씨는 한 번도 남편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노조가 없어서 그래”하고 답하니 돌아오는 질문이 가관이다. “노조를 왜 못 만들게 해요? 이명박 대통령은 가만히 있어요?” 그는 아이의 상식적인 질문에 당황했다고 한다. 19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삼성백혈병 문제를 다룰 소위 구성을 놓고 여야가 논의를 벌이고 있다. 국회가 아이의 상식적인 질문에 답할 때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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