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수강 통합진보당 정책전문위원

노동운동·사회운동·인권운동과 같은, 기존의 질서를 바꿔 보고자 하는 숭고한 운동이라 하더라도 그 목표를 그대로 실현해 내기는 어렵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 가는 것은 아니다. 활동가들은 목표를 정해 놓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여러 걸림돌을 만나기 쉽다. 그들은, 그 운동으로 피해를 본다고 느끼는 세력들의 반발에 맞닥뜨리거나 또는 그 운동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세력들, 운동의 성공이 보이는 시점에서 그 성과를 챙기려는 세력들의 개입으로 사태가 복잡하게 꼬여 가는 상황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씨를 뿌리는 사람과 열매를 따먹는 사람이 전혀 다를 수 있다. 운동은 가끔 뜻하지 않은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례를 보자.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신용(금융)민주화 운동 얘기다. 70년대까지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인종과 자산에 따른 고객 차별을 관행처럼 생각했다. 금융기관들은 이른바 레드 라인(red line)이라는 것을 설정하고 흑인·라틴계 이민자·빈민들은 그 선(은행 문턱)을 넘지 못하게 했다. 금융기관들이 수익에 도움이 안 되는 고객은 쫓아내는 디-마케팅(De-marketing) 전략을 일찌감치 쓴 셈이다.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없었던 흑인·라틴계 이민자·빈민들은 질병·부상·실직 등 인생에서 약간의 불운이 닥치기라도 하면 금세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들은 사실 약간의 돈만 융통할 수 있었다면 현재의 어려움을 모면하고 나중에 어떻게든 소득을 마련해 생활을 그럭저럭 꾸려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드 라인 때문에 그런 길이 막혔고 그에 따라 양극화와 빈곤은 더욱 심해졌다. 당시 미국의 인권운동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정당하게도 인권의 문제로 바라봤고, 그리하여 레드 라인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은 쉽게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이때 이들이 내건 구호가 신용민주화(Democratization of Credit)였다. 인종·성별·자산 정도에 관계없이 누구나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게 이 운동의 목표였다. 이러한 운동은 당시로서는 필요한 것이었고 그 취지도 좋았다. 인권운동가들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 고객차별은 결국 없어졌다(형식적이기는 하더라도).

이러한 운동이 금융자본가들에게는 어떠한 결과를 낳았을까. 80년대는 미국에서 금융자본이 막 팽창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새롭게 형성된 환경에서 금융기관들은 오히려 잉여자금의 운용처를 새로 발굴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마침 활발하게 전개된 신용민주화 운동은 금융기관들의 전략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 운동은 오히려 금융기관들이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했다. 90년대 들어 미국의 금융자본은 더욱 팽창했다. 이제 금융기관들이 나서 신용민주화를 외쳤다. 시민들은 누구나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누구든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내 집 마련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신용민주화 운동에 호응했다. 누구나 신용카드를 보유하고 '내 집'을 갖자는데 얼마나 좋은 얘기인가. 실제로 대출을 받아 내 집을 마련하는 서민들이 늘기 시작했다. 소득하위(4~5분위) 주택소유 비율이 89년 44%에서 2001년에는 49%로 올랐다. 그 과정에서 금융기관들은 엄청난 수수료를 뗐고 금융기관 임원들은 두둑한 보너스를 챙겼다. 그러나 신용민주화 운동은 2007년부터 시작된 주택금융 위기의 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아이러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화두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경제민주화를 바라는 세력, 경제민주화 논쟁의 성과만을 따먹으려는 세력, 경제민주화라는 본질을 흐리게 함으로 논쟁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가려는 세력 사이에 각축이 앞으로 벌어질 것이다. 그러다 자칫 미국의 금융민주화 운동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지 않게 해야 한다. 경제민주화 개념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별해서 정립해야 한다. 사실 금융에서 공정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금융민주화의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약탈적 대출, 대출에 따른 집값 폭등, 거품 붕괴에 따른 금융위기의 가능성까지 내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금융민주화 운동이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온 이유는 금융민주화의 내용을 금융기관에 대한 공정한 접근에 한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민주화 논의와 운동이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경제민주화의 내용을 독점의 해소나, 공정경쟁이라는 시장주의의 좁은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통합진보당 정책전문위원 (lin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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