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작년 제 친구는 영어회화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임신했어요. 그런 사람을 전문강사로 계약할 수 없다며 평가점수를 조작해서라도 재계약하지 말라고, 그 당시 제 친구의 교장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친구는 아이를 지키겠다며 재계약을 포기하고 지난 5월에 출산했는데, 그 이후에 채용되는 전문강사를 비롯해 기간제 교원들에게 근무시 결혼 및 임신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휴…. 정말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국초중등영어회화전문강사협의회가 소개한 사례다. 생존의 기로에 선 6천300여명의 비정규 노동자들. 바로 전국의 초·중등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전문강사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영어공교육을 강화하겠다며 2009년 8월에 도입해 생겨난 직종이다. 유령처럼 교육노동에 묵묵히 종사해 온 지 4년이 경과하는 내년 8월을 기점으로 속절없이 무더기로 잘리는 신세가 됐다. ‘어륀지’ 해프닝까지 일어나는 등 영어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이명박 정부에서 왜 영어교사들이 집단 대량해고를 맞게 된 것인가. 강사들의 계약기간을 1년 이내로 하고 최장 4년까지 기간연장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42조5항 때문이다.

애초부터 영어회화 전문강사들은 불안정한 계약직 일자리로 출발했다. 매년 상당수가 수시로 해고돼 왔지만 사회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규직 교사와의 차별뿐 아니라 다른 직종의 학교비정규 노동자들이 받는 각종 수당도 받지 못하고 임금인상에서도 배제돼 왔다. 최근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와 전국여성노조에 가입한 강사들이 나서면서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났다. 15만명으로 추산되는 80여개 직종의 다양한 학교비정규 노동자들 모두가 일상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 각종 차별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지만 영어회화 전문강사들처럼 대책 없는 집단해고에 직면해 있진 않다.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발단은 제도 도입 초기인 2009년과 2010년에 각 시·도 교육청이 능력 검증을 통과한 대규모 인력을 선발한 후 인력지원을 요청한 학교에 배치한 데서 비롯됐다. 즉 대다수 강사들은 절차상 교육청이 채용한 것과 다름없다. 다른 학교비정규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사용자 책임을 져야 할 교육감이 일선 학교장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문제를 키워 온 셈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문강사를 포함한 학교비정규 노동자들을 학교장 계약에서 시·도교육감 계약으로 전환해야 한다.

85% 이상이 초·중등 정교사 자격을 갖춘 영어회화 전문강사는 정규직 영어 전담교사를 단순히 보조하는 들러리가 아니다. 무너져 가는 공교육 시스템의 말단에서 학생들과 교감하며 가르치는 엄연한 교사노동자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했다. 가르치는 교사의 일자리를 시한부 운명으로 위태롭게 만들면서 양질의 교육을 바라는 건 이치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얕은 단견에 불과하다. 집단해고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정부가 나서 결자해지의 자세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직무유기를 해 온 주무부처 교육과학기술부와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앞장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42조5항을 폐지해야 한다. 상시지속 업무인 영어회화 전문강사들의 고용안정 대책과 처우개선 방도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 어리석음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한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3만명이 넘게 조직된 학교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올해 하반기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투쟁과 함께 주목받고 있다. 호봉제 시행과 교육감 직접고용, 정규직화 실시를 핵심 요구로 내건 그들의 투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장 조직화와 맞물려 공공부문 직접고용 정규직화 흐름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 목숨이 아니라 엄연한 사람 목숨으로 인정받으며 교육현장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역할하기 위한 학교비정규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가 한여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굴 전망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