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가끔 내 머리는 이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나 버린다. 방금도 그랬다. 지금 노동과 자본의 지위가 이런 거, 이 모양 이 꼴인 거. 그것은 이것 때문 아닐까. 자본은 진화했는데 노동은 진화하지 못해서. 오늘도 현대자동차에서 정규직은 주간연속 2교대제 쟁취로, 비정규직은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화 쟁취로. 쌍용차 정리해고자들은 대한문에서 희망텐트를 치고서, 시그네틱스·포레시아 등 수많은 사업장 노동자들이 거리에서 정리해고 철폐로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전임자급여 금지·교섭창구 단일화 등 개정 노조법의 시행에 따라 노동조합이 존속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자본에 맞선 노동의 크고 작은 투쟁으로 이 세상은 하루가 열리고 닫힌다.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노동은 자본에 맞서 요구하고 투쟁해 왔건만 지금 노동과 자본의 지위가 이런 것은 자본의 진화 때문이 아닐까. 노동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압도적 다수가 소수에 맞서 노동의 권리 쟁취를 위해서 이렇게 투쟁해 왔건만 왜 오늘도 사업장에서 거리에서 투쟁한다고 이 난리란 말인가. 그러니 지금 내 머리는 이젠 진화론을 제멋대로 갖다 붙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뭐 그렇더라도 어쩌겠는가.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자꾸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고 있으니.

2. 어차피 이 세상은 봉건의 지배자를 몰아낸 후 세상의 지배권은 무주공산이었다. 하긴 뭐 세상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게 저 봉건의 성안에 왕과 귀족·영주, 또는 지주와 양반의 것이라는 게 누가 봐도 이상했다. 경작하는 농민 위에 군림하면서 경작물을 차지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상한 세상을 이상한 것이라고, 그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인민은 권리선언했다. 어쨌든 자본은 세상을 제 것으로 만들었고 노동은 그 자본에 복종했다. 그것이 세상의 운동법칙이라고, 필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복종이 필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과학을 좋아하고 세상만물이 필연의 법칙으로 굴러간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그렇다 말하겠는가. 내 것을 남이 차지하는 걸 필연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러니 그것은 첫 번째 노동의 패배였다고 말해야 한다. 그 뒤 자본은 자신의 운동을 세상의 운동이 되게 했고, 그것은 사람의 욕망을 자신의 운동에 포섭할 수 있었기에 성공했다. 사람이 욕망하는 곳마다 자본의 운동이 닿았고 상품으로 생산되고 소비됐다. 국민총생산의 성장률은 한 나라에서 자본의 성장률인 세상이 됐다.

3. 자본에 맞서 노동운동이 전개됐다. 그러나 그 운동은 자본의 운동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은 자본의 운동을 세상의 운동으로 승인하고서 전개됐다. 노동운동은 자본의 운동이 아니라 자본의 소유만 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니 노동운동이 그 자본의 소유권을 자본가로부터 박탈해도 소유권자만 변경될 뿐이었다. 여전히 자본의 운동은 세상의 운동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노동의 세상이라고 노동하는 인민의 권리선언을 했다. 노동자는 여전히 공장에 가서 하던 대로 노동했다. 기존의 방식대로 생산은 수행됐고 공장의 주인이라 불리며 더 많은 생산량을 주문받아 생산해야 했다. 노동운동가 아무개가 외치던 노동자 세상은 자본가 없는 세상이었을 뿐 기존 자본의 생산방식이 폐기된 세상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자본은 세상의 운동을 자신의 것이 되도록 진화했지만 노동은 그렇지 못해서 아닐까. 위험을 수반하는 대규모의 기술적 생산, 현대의 생산에 적합하도록 자본은 진화했다. 심지어 자본은 고유의 사적소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대규모적인 소유의 결합방식을 고안했다. 회사, 유한회사와 주식회사 등. 위험의 제한 방안이 마련됐다. 유한책임제도·면책제도 등. 소유에서 인격성을 제거해서 자본의 이전을 신속하고 자유롭게 만들었다. 소유의 극단적인 지분화와 증권화가 진행됐다. 이제 이 세상에서 자본은 자본가라는 인격마저도 회사와 주권 뒤에 숨겼다. 자본에 대한 비난이 곧 자본가에 대한 비난이 되지 않는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다. 현대의 회사에서 자연인으로서의 자본은 법인으로서의 자본에 가려 점점 보이지 않는다. 단지 아무개가 몇 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다고 알 뿐이다. 이런 것들이 현대를 자본의 것이 되게 했다. 현대의 공장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부합하기 위해서 자본은 소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신하며 진화를 계속해 왔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에서 이러한 진화를 더욱더 교묘하게 활용됐다. 정리해고니 파견노동이니 교섭창구 단일화니 하는 노동자와 노조의 기존 권리를 법적으로 침해하는 일은 일반화됐다. 그러나 이것도 위에서 살펴 본 거대한 자본의 진화 앞에서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4. 노동은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개별화되고 일신전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결합은 민법상 조합을 겨우 벗어난 민법상 사단 정도인 고작 노동조합이 전부다. 그것은 자본이 짜 놓은 산업과 사업장에 고용된 노동이 자본에 요구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수준의 결합이다. 노동의 결합은 세상의 운동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의 운동에 편승해서 보다 많은 몫을 얻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과 같은 결합방안은 고안하지 못했고 자본과 같은 유한책임 등 책임의 제한방식을 실현하지 못했다. 조합단위로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고자 발버둥쳤던 것이다. 세상의 운동을 자신의 운동으로 담아내기 위해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새롭게 틀을 만들어 내지 못해 왔다. 그러니 아직도 노동자의 결합은 기껏해야 민법상 조합을 겨우 벗어난 노동조합일 뿐이다. 그것으로는 그저 자본에 복종하는 노동의 권리만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노동조합마저도 노동자가 복종이 아닌 주인일 수 있도록 제대로 민주주의로 그려서 세워 내지도 못하고 있다. 대의제가 노동자의 의사를 반영해서 작동되지 않고 있다. 대표가 임기동안 권력을 휘두르는 노동에 대한 권력의 기구로 기능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여전히 개별화된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의 운동을 보고 그들의 권리를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껏해야 노동자는 보다 규모가 큰 노동조합으로 자본으로부터 노동자권리를 확보하고자 투쟁하고 있다. 21세기로 진화한 자본에 맞서 여전히 18세기 노동으로서 그들의 권리를 쟁취하겠다고 투쟁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껏해야 노동조합은 보다 많은 노동자를 조직해서 18세기부터 외쳐 왔던 임금 등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한 교섭하고 있다. 그러면 노동에 맞서 한참 진화해 버린 자본의 힘에 밀릴 수밖에 없다. 정치투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화하지 못한 노동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아주 우연적이고 외부적인 특별한 상황 전개가 아니라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지위는 변하기 어렵다. 그저 자본의 운동이 고장날 때가 언제냐고, 그날이 오기를 과학적으로 정치경제학을 읊조리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본은 진화해 왔는데 노동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첫 번째 패배 이후 노동의 패배는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소유권을 쟁취했다 제 것이 됐다 해도 노동이 세상의 운동을 자신의 운동에 일치시킬 수가 없으니 그저 자본가 없는 자본의 운동은 계속되는 것이고.

5. 수천년 전 고대 이집트에도 노동자가 있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는 파라오로부터 임금을 받고서 ‘왕들의 계곡’ 등에서 근태관리를 받고 노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파라오가 임금을 제때에 지급하지 못하면 파업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세상은 파라오의 것이었으니 노동자는 파라오를 위해서 일하고 파라오로부터 급여를 받았다. 자본 아래서 노동하는 현대의 노동자와 무엇이 다르다고 말해야 할까. 자본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다르다. 노동자는 파라오가 아닌 자신, 즉 자본에 복종해서 일하고 있으니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향유하는 기본권목록을 들이대며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던 그는 그 누구에 복종하며 일하고 그 대가로 급여를 받는다. 누구가 누구냐 하는 것만 달라질 뿐이다. 노동자에게 자본은 현대의 파라오다. 보다 많은 임금을 주고 보다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다면 노동자는 파라오라도 그를 위해서 일할 것이다. 수천년 동안 인간의 역사는 세상의 주인을 바꿨다. 더 이상 파라오는 주인이 아니다. 그것이 오늘 노동자를 파라오로부터 임금을 받고서 노동할 수 없게 할 뿐이다. 그러나 파라오라는 인격체를 국가라는 법인격으로 갈음한다면 어떻게 될까. 1인 지배의 세상은 이제 무인지배의 신천지가 되는 것일까. 인민은 파라오의 자리를 국가가 차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인민의 세상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그 국가를 차지한 자, 즉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일 뿐이다. 그러면 자본가를 국가로 갈음하면 어떻게 될까.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의 소유권을 국가의 소유로 돌린다면 자본 없는 세상이니 노동자의 신천지인 걸까. 노동자는 자본의 자리를 국가가 차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자의 세상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그 국가를 차지한 자, 즉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그 세상을 노동자가 아닌 누군가가 차지하고 행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의 세상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노동자 세상은 노동을 복종시키는 자본의 운동이 계속되는 한 아직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노동자 세상이라고 노동자에게 자신의 세상을 위해서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제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복종시키는 자에 맞설 권리조차 없게 된다. 당장 내일 자본의 운동이 고장 나더라도 세상의 운동을 자신의 운동으로 일치시켜 내지 못한다면 노동의 세상은 올 수가 없다. 노동자가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하지 못한다면 노동의 세상은 올 수가 없다. 주인에 복종하면서 아무리 노예가 아니라고 말해봐야 소용없다. 그러니 지금 노동은 세상의 주인이 되고자 새로운 진화를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작업장이든 아니든, 노동자의 단체든 아니든 노동자가 머무는 그곳에서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이집트의 파라오든 현대의 파라오든 또는 미래의 파라오든 파라오는 파라오일 뿐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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