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
비정규실장

한국전쟁 62주년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여러 신문이 전쟁 기념기사를 쏟아낸다. 이들의 기사는 현실정치의 이념논쟁을 적당히 버무려 통합진보당을 둘러싼 색깔공세에 밑거름을 열심히 주고 있다.

때마침 어젯밤 KBS의 간판 프로그램 ‘역사스페셜’도 한국전쟁 특집으로 ‘마거리트 히긴스의 6·25’를 방영했다. 21일자 신문들도 이 사실을 보도했다. 한겨레와 한국일보는 군복을 입고 전장에 선 종군여기자 히긴스가 환히 웃는 사진으로 이 사실을 소개했다.

한겨레는 히긴스가 낙동강 전선으로 달려가 전투를 취재·보도했다며 “히긴스의 취재로 우리 해병대가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유명한 별명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한겨레는 “히긴스가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며 지원을 호소했다”고 썼다.

20년생인 히긴스는 30대 초반에 뛰어든 한국전쟁 때까진 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종군기자의 전형이었다. 히긴스는 1차 대전 때 연합군의 조종사로 참전한 사업가 아버지 밑에서 홍콩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12살까지 히긴스는 불어와 중국어만 했다. 이후 프랑스로 가 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에서 42년까지 대학을 다녔다.

히긴스는 졸업 후 44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런던지국으로 발령받았고, 미군이 독일을 점령하면서 2차 대전을 종전시킬 때 처음으로 전쟁기사를 썼다. 47년 히긴스는 베를린지국으로 옮겨 미군 점령하의 베를린 봉쇄를 취재했다.

한국전쟁 때는 동경지국에서 일하다가 전쟁 발발과 함께 한반도로 건너와 취재했다. 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종군한 히긴스는 전투복을 입고 먼지를 화장품처럼 바르고 뛰어다녔다. KBS 역사스페셜은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50년 9월15일 상황을 그녀의 기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히긴스는 51년 전쟁의 참상을 ‘자유를 위한 희생’이란 부제를 단 <한국전쟁>을 통해 알렸고,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전쟁에 대한 강연회를 열어 유명해졌다.

그러나 히긴스의 참다운 종군기자 생활은 여기까지다. 누구나 나이 들면 보수화된다지만 히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잇단 종전 경험으로 주가를 올린 히긴스는 백악관 만찬장이나 얼쩡거리는 정장의 부인으로 변했다.

5·16 쿠데타 4주기인 65년 5월16일 대통령 박정희는 존슨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월남전에 2천여명의 한국 젊은이를 파병하는 대가로 개발차관 1억5천만달러를 구걸하는 자리였다. 5월18일 밤 존슨이 주최한 백악관 만찬장엔 박정희와 함께 한국 외교관들도 배석했다. 히긴스 기자는 당시 유엔대사였던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과 함께 앉아 밥을 먹었다.

히긴스는 65년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인도차이나 반도로 마지막 취재를 갔다가 풍토병으로 쓰러져 66년 1월 46살에 생을 마감했다.

한국전쟁에서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보도했던 히긴스는 베트남전쟁에선 그렇지 못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개입의 정당성을 미국민들에게 선전하기 위해 미국인 종군기자들에게 미국의 괴뢰정권인 디엠 정부를 극구 옹호하는 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전장의 젊은 기자들은 자국 정부의 입장대로 취재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나 ‘AP통신’의 말콤 브라운, ‘UPI’의 닐 시한 기자는 디엠 정권의 실정을 파헤쳐 베트남전쟁의 장래를 비판했다. 나아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비판했다. 오죽했으면 케네디가 뉴욕타임스에다 핼버스탬 기자의 소환을 압박했을까.

냉전 사고에 젖었던 보수신문과 몇몇 기자들만 미국 정부의 말도 안 되는 베트남전 개입을 지지했다. 히긴스도 그 대열에 함께했다. 히긴스는 3명의 젊은 기자를 향해 “젊은 기자들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 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혹평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히긴스가 우리 정부와 국영방송에 의해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홍보처는 2005년 6월27일자 국정브리핑에서 이현표 주미 문화홍보원장의 기고 형식으로 ‘마가렛 히긴스’를 재조명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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