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며칠 전 80년대 대학을 같이 다녔던 선배와 두 친구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일상에서부터 이것저것 자유롭게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학생운동의 경험이 있었다. 지하서클 활동을 했고, 시국사범으로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친구도 있었다. 지금은 진보적 경제학자, 전교조 교사, 한겨레 기자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술자리가 늦어지면서 우리는 솔직한 정치적 선호를 말해 보기로 했다. 누가 대통령이 됐으면 하고 바라는지,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각각 박근혜·김두관·안철수를 꼽았다. 김두관이 됐으면 한다는 친구는 교육 문제에 관해 쓴 자신의 책을 읽고 직접 이야기를 듣기 위해 초청했던 사실을 말하며, 그것만으로 자신은 그를 지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모두들 수긍했다. 안철수가 됐으면 한다는 친구는 지금 거론되는 민주통합당 후보들에게 아무런 열정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을 들었다. 안철수에 대한 생각이 달라 논란은 약간 있었지만, 지금의 정치에 대한 불만은 공통적으로 모두 컸다. 박근혜를 꼽은 선배는 지금의 야당은 반대에는 능하니 야당을 계속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며, 민주통합당 정부가 된다면 그 결과는 지금 정부보다 낫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이 역시 논란은 있었지만, 민주통합당이 정부를 이끌 실력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모두들 내 답을 기다렸는데, 나는 심상정을 말했다. 그 순간 내가 다 당황할 정도로 모두 큰소리로 웃어 댔다. 선배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지 하며, 말이 되는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또 다른 친구는 심상정이 실력 있는 국회의원인 사실은 인정하지만 지금의 통합진보당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선거에서 진보 쪽에 “마지막으로” 투표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더는 찍지 않을 생각이란다. 그래도 진보정당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옹색한 변명을 했는데, 이 말을 받아 잠자코 듣고 있던 한 친구가 이렇게 응수했다. “지금 진보는 보수적 진보야.” 그는 지금의 진보가 노동자나 서민의 편에 서고 그런 방향에서 입법 활동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 진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난한 서민이 아니라 자신들 내지는 그들이 속한 정파의 이익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반문했다. “지난 두 달 동안 정파로 나눠 신경전 한 것밖에 없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래도 이번 전당대회에서 대표 경선 잘 하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를 이야기했더니, 반응이 거의 꿈 깨라는 식이었다. 처음 ‘보수적 진보’를 말했던 친구는 “당을 볼모로 정파 이익을 서로 움켜 쥐려고 하는데, 거기 진보 아니야 보수야 보수”라며 나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옆의 있던 친구는 지난 선거에서 표를 준 230만명의 유권자 가운데 이 당이 이런 걸 알았더라면 표를 줄 사람은 얼마나 됐겠느냐며, 지지했던 유권자에 대한 사후적 책임성도 못 보여 주는 이 당에게 엄청난 예산이 지급되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 13석을 갖게 하는 것이 과연 민주적인가를 묻기도 했다. 선배는 아예 “사실상 공적 자산의 약탈자들이지”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들었다. 다음날 아침, 문자가 왔다. “다들 잘 들어갔지. 어제 오랜만에 즐거웠다. 종종 만나자.” 그 바람에 지난 밤 이야기를 되새겨 봤는데 사실 틀린 이야기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노동운동 출신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평소 바람을 말했을 뿐인데 하는 억울한 마음도 있었지만 통합진보당을 떠올리니 무책임함·지지부진함·짜증남 등의 표현들이 내 속을 휘젓고 다녔다. 그렇다고 나까지 박근혜나 김두관, 안철수를 지지할 수는 없다는 오기도 들었다. 그러다 컴퓨터를 켜니 통합진보당 당 대표로 무슨무슨 정파가 밀고 있다며 같은 성씨의 두 사람 이름이 떠올랐다. 갑자기 분노가 불같이 치고 올라왔다. 이건 뭐야. 그들이 뭘 했다고. 차라리 ‘경기동부’는 잘못된 신념이긴 해도 헌신적이긴 했는데, 이건 웬 온통 기회주의인가. 정파에 속하지 않은 당원 입장에서는, 왜 이런 정파들 선거 놀음에 다시 또 이용돼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히고 만 것인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parsh03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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