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지난 총선 이후 통합진보당에서 전개된 일련의 사태가 꼭 부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운동권 내지 진보를 바라보는 시민의 생각을 민주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사태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민주화운동에서 그들이 감당했던 희생과 노력에 대해 가졌던 부채감으로부터 벗어나 진보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진보도 정치적으로 무책임할 수 있고 민주적인 가치의 파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진보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냉정한 시각을 갖게 했다.

그러면서 진보에 대해 어느 정도는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진보는 왜 운동은 잘하는 데 정치적으로는 무능할까. 체제와 제도에 맞서 항의와 싸움은 잘하는데 뭔가 대안적인 체제를 만들고 제도를 운영하면서 성과를 일궈 가는 일에 있어서는 왜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하는 걸까. 작은 정당을 제대로 이끌 능력도 안 되면서 국가와 정부를 책임질 수는 있을까. 필자가 볼 때 하나같이 중요한 문제제기라 생각한다. 정치엘리트 자신들만을 위한 ‘제도 정치’와는 달리 자신들은 ‘운동 정치’를 한다거나 하면서 은근히 드러냈던 우월의식으로는 이제 누구도 설득할 수 없게 됐다.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의 편향된 이해 역시 이번 사태로 파탄을 맞게 됐다. 그간 진보는 자신들만의 민주주의가 갖는 특별함을 내세웠다. 우리는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안 한다거나, 절차적 민주주의는 저급한 것이고 자신들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거나, 공식적 대표의 체계가 중심이 되는 대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고 풀뿌리 당원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직접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라거나 하는 등 자신들만의 민주주의가 옳음을 강조했던 모든 논리들은 웃음거리가 됐다.

진보파 안에서의 논의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한쪽은 사태를 진보의 초심, 진정성을 잃어서 생긴 일이며 따라서 더 진보적이어야 한다거나 진정한 진보로 거듭나야 한다고 보는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낡은 정파 질서 위에 서 있는 당 운영방식에서 벗어나 민주적 가치와 정치적 책임성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전자가 ‘진보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면 이 후자는 ‘민주적’이고 ‘정치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시민과 멀어져 진보만의 세계로 물러서는 길이고 후자는 시민들의 의식세계로 과감히 들어가는 길이다.

필자는 '진보정치도 정치'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사회 진보는 과거에도 진보적이었고 지금도 진보적이었다. 그 진정성과 초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사람은 성년에 들어설 때 가졌던 사회적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그때 가졌던 민중적 열정, 좀 더 평등하고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함께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살면서 그런 열정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지키고 실천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종류가 다른 일이다.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는 아주 좁은 오솔길만이 있다. 그 길에서 종류가 다른 두 일의 가치를 병행발전하게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권력이 갖는 악마적 요소에 굴복하지 않는 것, 오히려 권력을 선용할 수 있는 강한 내면과 유능함을 갖추는 것, 그것 없이 정치를 통해 진보적 가치를 실현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고 진보적이어야 한다거나 진정성과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소리 높여 외친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진보정치도 정치다. 정치는 진보보다 수백, 수천 배 더 넓은 세계다. 인간이 갖고 있는 복잡성을 다른 어떤 세계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게 담고 있는, 가장 인간적인 세계가 정치다. 진보 안에 정치를 억지로 맞출 수는 없는 일이다. 진보를 위한 특별한 정치? 진보를 위한 특별한 민주주의? 그런 건 없다. 있는 그대로의 민주주의, 있는 그대로의 정치의 세계에 적응해서 제대로 민주적이어야 하고 제대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에서 진보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 만큼 민주적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진보가 산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parsh03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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