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정기훈 기자

최근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 사태를 둘러싸고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민주노총이 당내 진성당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 철회 여부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17일 10시간에 가까운 중앙집행위원회 논의를 거쳐 '조건부 지지 철회'로 입장을 정리했다. 통합진보당이 노동중심성을 확보하고,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혁신안이 조합원과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는 수준으로 실현될 때까지 당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철회한다는 것이다.

김영훈<44·사진> 민주노총 위원장은 19일 저녁 서울 정동 민주노총 위원장실에서 가진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중집 회의가 가장 힘들었다"면서도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격조있는 토론을 벌인 중집 위원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자기혁신을 위한 제2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번호를 배정하는 과정에서 노동계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설적이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 내 최대세력인 것이 확인됐다.

"삼자통합 과정에서 노동의 목소리가 소외된 것이 맞다. 그렇다 보니 창당했지만 당 지지율은 민주노동당 때와 대비해 오르지 않았다. 국민참여당과 합치면 지지율이 15%~20% 대로 갈 것이라는 일부 언론의 보도도 있었지만 허황된 꿈을 꾼 것이다. 민주노총 없이도 충분히 대중적 진보정당이 가능할 것이라는 오류를 범했다. 우경화된 노선을 추구한 것이다. 선거 직전까지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조준호 대표를 영입해갔다. 당에서 필요하다고 모셔가 놓고, 의견이 다르다고 폭행했다. 이것이 바로 통합진보당의 가장 큰 비극이다.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 것이다.

당은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돼야 한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내건 당의 정체성이다. 민주노총을 존중하라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가치를 정책의 기준으로 삼고, 노동자 대표를 전면에 앞세우는 정당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통합진보당의 정체성이어야 한다. 지난 중앙위에도 호소했다. 우리 말을 다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경청해달라는 것이었는데 폭행으로 돌아왔다."

-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철회했다. 결정과정에서 의견이 엇갈렸던데.

"의견은 크게 세 가지였다. 애초부터 통합진보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는 주장, 국민참여당과 합쳐지긴 했지만 강령이나 정책으로 볼 때 그 자체로 새로운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는 민주노총의 입장이다. 진상조사보고서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2년 5개월 동안 크고 작은 쟁점에 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회의가 가장 힘들었다. 의견 분포도 다양하고 진보정치가 완전히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었다. 중집위원들이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야말로 격조있는 토론을 벌였다."

- 혁신비대위의 쇄신을 6월30일까지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어느 정도까지 쇄신이 돼야 한다고 보나.

"통합진보당은 자정능력이나 자기결정 구조 자체가 붕괴됐다. 대표적 사례가 폭력사태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당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보정당이 가야 할 길에서 일탈했다. 이런 이유로 조건부로 지지를 철회했다. 조건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공당, 제대로 된 진보정당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당 중앙위가 결정한 혁신안을 책임있게 집행하고, 노동 중심성 약화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정상적인 정당이요, 자정능력이 있는 공당이다. 통합진보당이 조합원과 국민 열망에 부응하는 수준으로 변화할 때 지지여부를 다시 논의할 수 있다. 혁신비대위가 중앙위로부터 수임받은 혁신안을 책임있게 집행하는 게 지지여부의 대전제다."

- '지지 철회'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민주노총과 통합진보당은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처럼 배타적 지지 관계가 아니다. 통합진보당은 각종 선거에서 전술적으로 연대하고 지지하는 정당으로서의 위상이 있다. 조건부 철회는 엄밀히 말하면 선거방침에 대한 조건부 철회다. 선거방침은 당을 진보정당으로 규정하는 것, 당원 가입과 세액공제 사업, 지역구와 비례후보에서 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다. 당장 선거가 없기 때문에 후보 지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만 당원 가입과 세액공제는 중단된다."

- '자기혁신을 위한 제2 정치세력화 특별기구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은 진보대통합을 완수하지 못했다. 미완의 진보통합이 됐고, 복수의 진보정당이 여전히 존재한다. 주체적으로 평가할 때 우리 실력이 부족했다. 그동안 정치위원회가 상설위원회로 존재했지만 민주노총 내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 민주노총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결집시키지 못하니 당이 강제력을 받지 못했고, 민주노총은 외면당했다. 자기혁신의 내용은 노동계급의 단일한 목소리를 모아내는 것이다. 기존 정치위원회를 뛰어넘어 여러 정치적 견해를 가진 세력들이 함께 논의하고 전 조직적으로 토론해나갈 수 있는 기구로 만들 것이다."

- 민주노총에서 정당 집중투표를 했던 당에서 부실·부정 선거 논란과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민주노총이 책임져야 할 것은 없나.

"이번 사태에 대해 저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총연맹 위원장은 정당의 대표가 아닌데 선거 잘못을 두고 거취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시점에 제 이름으로 대 조합원 사과와 총선 평가에 기초한 담화문을 발표할 생각이다. 총선 평가는 이번 사태로 인해 구체적으로 하지 못했다. 특별기구를 통해 총선 방침부터 과정까지 전반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 김재연·이석기 당선자는 최근 당적을 서울시당에서 경기도당으로 옮겼다. 구당권파에서는 혁신비대위를 인정하지 않고 당원비대위까지 구성했다. 민주노총이 기대하는 혁신과 거리가 멀어진 느낌이다.

"부실·부정 선거 논란보다 그 해결과정이 더 절망스럽다. 정당 내에서 다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걸 진보정당답게 해결하는 것을 기대했다. 폭력사태로 얼룩지고, 당적 변경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절망스럽다. 우리가 요구한 상식이 안 통하는데 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게 가능하겠나. 도당을 위장전입한 사람이 국회의원이 돼서 국무위원 인사청문회를 할 때 위장전입을 지적할 수 있겠나. 왜 저런 일들이 벌어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사퇴할 명분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는데, 명분은 대의에 복무할 때 따라온다. 자기를 희생할 때 명분은 쌓이는 것이다. 그분들께 꼭 얘기하고 싶다. 지금 억울함이 클수록 나중에 명예가 회복되면 훨씬 크게 회복될 수 있다."

- 8월 총파업을 앞두고 통합진보당 사태가 터지면서 총파업보다는 정치 문제에 쏠린 측면이 있었다.

"세상 이치라는 게 음지가 양지되고, 위기가 기회가 된다. 너무 절망스러운 상황이지만 희망이 있다면 바로 산별대표자들의 결집력이다. 그 어느 때보다 8월 투쟁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우리 힘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높은 의지를 보이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만큼 시민사회에서 민주노총에 거는 기대가 컸던 적이 있었나 생각한다. '진보정치의 구원투수'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면 민주노총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은 보다 성숙될 것이다. 권위있는 조직이 총파업을 한다고 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민주노총은 이번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 철회 여부를 두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에 대해 적잖이 부담스러워했다. 김 위원장은 "지나친 언론의 관심은 부담스럽지만 민주노총이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8월 총파업 때도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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