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 노동절 기념대회 참가자들이 서울역에서 출발해 서울광장까지 행진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 상복 차림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영정을 들고 앞줄에서 걸었다.정기훈 기자

노조 조끼를 입은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무대에 올랐다. 그는 조끼를 벗고, 작업복을 벗고, 안경과 신발을 차례대로 벗었다. 잠시 허공을 주시하던 노동자는 뒤로 걸어가 관 속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도착한 그의 동료는 오열했다. 그 뒤에도 관은 하나 둘씩 늘어 갔다.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 주최 122주년 세계노동절 기념대회는 쌍용차와 재능교육, 콜트·콜텍, 코오롱 등 해고로 장기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들의 퍼포먼스로 시작됐다. 여느 노동절 대회보다 분위기가 엄숙했다. 쌍용차는 2009년 정리해고 이후 3년, 재능교육은 1천600여일, 콜트·콜텍은 7년, 코오롱은 8년째 투쟁하고 있다.

"노동자가 노동자임을 인정받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투쟁을 시작할 때는 몰랐습니다. 이제 만 5년. 저희도 지쳐 갑니다. 언제까지 죽어 가는 동지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것입니까. 더 이상 죽어가는 동지를 위해 향을 피우며 슬프게 울지 맙시다. 연대하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마이크를 잡은 유명자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장은 "이 자리에 왔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함께하면 승리의 날이 반드시 온다고 믿자"며 연대를 호소했다. 상복을 입은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죽어 가는 동지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독방에 있는 한상균 동지가 얼마나 피가 마르고 애를 태우며 몸부림쳤을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며 "이달 19일 이 자리에 모인 동지들이 모두 모여 준다면 쌍용차 문제를 연대의 힘으로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고는 살인이다, 정리해고 박살내자"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촉구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민주노총 조합원과 학생 1만여명은 서울광장에서 열린 본대회에 앞서 서울역에 집결해 을지로를 거쳐 서울광장까지 행진했다.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중단, 노조법 전면 재개정'이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따라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과 집행부, 이강실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박원석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당선자가 앞장섰다. 이들 뒤로는 22명의 쌍용자동차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든 학생과 노동자가 뒤따랐다. 시민과 외국인 관광객들은 노동자들의 행진이 신기한듯 스마트폰에 행진 모습을 담았다.

노동자들은 남대문로 5가에 위치한 YTN 본사 앞에서 잠시 행진을 멈췄다. 언론노조 YTN지부는 배석규 사장 퇴진과 공정언론 회복·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고 있다. 김정욱 언론노조 YTN지부장은 방송차량 위에 올라 "공정언론을 위해 싸우다 해고된 언론노동자 6명은 3년8개월째 뉴스타파를 만들며 싸우고 있다"며 "파업 중인 MBC·KBS·YTN·연합뉴스·국민일보 노동자들은 공정언론을 회복할 때까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대생들은 의사 가운을 입고 영리병원 반대를 외쳤다. 청소노동자들은 빗자루에 '비정규직 철폐하자'는 구호를 붙이고, 손에 들었다. 공장 이전으로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K2 노동자들도 '생산부 유지'라고 적힌 빨간 조끼를 입고 행진대열에 합류했다. '웃다가 병든 사람들'인 감정노동자들은 '유통노동자 건강권 보호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잠옷을 입고 걸었다. 다함께는 "노동자 투쟁으로 이명박근혜 저지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 상복 차림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영정을 들고 앞줄에서 걸었다.정기훈 기자


노동자·시민 품으로 돌아온 서울광장

이날 오후 2시20분께 시작된 행진은 오후 4시께 마무리됐다. 서울광장은 행진을 마친 노동자들로 꽉찼다. 이날 대회에는 이례적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여해 축사를 했다. 박 시장은 "여러분이 함께해 주셔서 서울시장이 됐다"며 "이제 누구나 신고만 하면 광장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지하철 해고 노동자를 복직시키고 25개 서울 자치구에 노동복지센터를 만들고 있다"며 "민주노총과 함께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강승철 사무총장은 대회 시작에 앞서 조중동과 종편 관련 기자들의 집회 취재를 거부했다. 본대회는 김영훈 위원장의 대회사와 연대단체들의 축사, 문화공연으로 이어졌다. 대회 끝에는 16개 산별연맹 위원장과 서울·경기본부장이 무대에 올라 각 산별의 요구사항을 밝히고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회는 오후 6시께 마무리됐다.

행진에 앞서 전국공무원노조와 사무금융노조·연맹, 보건의료노조는 사전대회를 개최했다. 전국공무원노조(위원장 김중남)는 이날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조합원 3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사전집회를 열고 정부의 노조 설립신고서 반려를 규탄했다.

공무원노조 "조합원 총회로 정권과 역사 바꿔 낼 것"

김중남 위원장은 “5월 전국 현장순회를 시작으로 10월20일 14만 조합원 상경총회를 통해 정권과 역사를 바꿔 낼 것”이라며 “민중을 두려할 줄 아는 정권을 만들어 노조 설립신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의헌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은 “우리가 함께 싸워 정권을 무너뜨려야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노동자를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며 “공무원노조가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노조는 투쟁결의문을 통해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공무원노조 설립신고 반려를 문제 삼으며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며 “우리는 노조 자유설립주의 원칙이 지켜지도록 투쟁하고 공무원노조 역사와 정당성을 지켜 가기 위해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보건의료노조·시민단체 "영리병원 폐기하라"

보건의료노조(위원장 유지현)와 무상의료국민연대·의료민영화저지 범국민운동본부 회원 300여명은 이날 오후 서울 계동 보건복지부 앞에서 노동·시민·사회단체 공동 결의대회를 열고 “투자개방형 영리병원을 허용하는 경제자유구역법 23조를 개정하라”며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폐기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유지현 위원장은 “영리병원이 도입되면 이윤창출을 위한 비정규직 고용이 남발되고 의료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며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영리병원 도입이 아닌 병원비 걱정 없는 무상의료 실현”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경제자유구역법 23조 개정 및 시행령·시행규칙 폐기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의료법 개정·의료채권발행법 등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영리화 정책 저지 △국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투쟁을 결의했다.

사무금융노조·연맹 "금융공공성 강화해야"

사무금융노조·연맹(위원장 박조수)은 이날 오후 서울 충정로3가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본점 앞에서 모여 사전결의대회를 열었다. 골든브릿지지부는 단체협약 해지에 맞서 지난달 23일부터 파업을 벌이고 있다. 노조·연맹이 노동절을 맞아 사전대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조는 올해 창립을 기념해 사전대회를 마련했다. 노조 산하 40여개 지부와 연맹 산하 20여개 노조 조합원 400여명이 참석했다. 노조·연맹은 △골든브릿지 투쟁 승리 △노조법 재개정 △농협의 관치 야욕 저지 활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박조수 위원장은 “청와대 고위관료들의 비리가 잇따라 터지는 이때 조합원들이 단결해 금융공공성 강화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민주노총의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는 전국의 12개 지역에서 동시에 개최됐다.

연윤정·양우람·조현미·윤자은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