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강원도 문막의 만도공장 정문 앞. 트럭이며 지게차며 온갖 운송수단들이 들락날락하는 통에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짐칸마다 가득 실린 화물들이 한눈에도 활기 넘치는 공장임을 알게 한다.

그런데 정문을 지나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활기’가 어느 한 쪽에 편향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입·출고 차량 때문에 혼잡한 조향공장이나 주물공장과 달리 맞은편에 위치한 주조공장은 적막감이 가득했다. 어두컴컴한 공장 내부에는 노동자들의 손길을 잃어버린 기계들이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이곳은 만도 문막공장 속의 섬이나 다름없는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 공장이다.

알루미늄이나 마그네슘을 녹여 자동차의 조형장치와 에어콘 냉매압축기(콤퓨레셔)·핸들의 금속 틀을 만드는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 노동자들은 이달 2일 공장을 멈추고 옥쇄파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지난달 29일 회사로부터 고용관계 종료 통보서를 받았다. 회사가 110여명의 전 직원에게 보낸 통보서에는 "경영적자로 인해 폐업 수순을 밟고 있으므로 다음달 1일부로 전원 고용관계를 해지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회사 문을 닫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하겠다는 것이다.

흑자부도로 갈가리 찢긴 공장, 인생 뒤바뀐 노동자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이 처음부터 만도 문막공장 속의 섬으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장은 99년까지 만도기계 다이캐스팅사업부라는 문패를 달고 있었다. 만도가 외환위기로 흑자부도 나면서 외국자본에 조각조각 찢겨 팔렸는데 다이캐스팅사업부도 99년 미국계 세계적인 다이캐스팅업체인 깁스(GIBBS)사에 1천812만5천달러에 매각됐다.

애초에 한 몸뚱이였던 탓에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 공장 지하에는 만도 문막공장의 기계실이 자리하고 있다.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 공장 지하 기계실 전원이 꺼지면 만도 문막공장 전체가 가동이 중단되는 아찔한 사태가 벌어진다.

알짜배기 기업인 만도기계를 5개로 쪼개 팔았던 미국계 금융자본 로스차일드펀드는 당초 주물공장을 매물로 내놨다가 인수자가 없자 다이캐스팅사업부를 매각해 버렸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 품질관리부에서 일하고 있는 이경렬(55)씨는 87년 만도기계 안양공장에 입사했었다. 당시 총각이었던 이씨는 여자에게 차이는 바람에 혈혈단신 짐을 싸서 문막공장으로 내려왔다.

“문막으로 발령받은 게 90년 11월이었요. 그때만 해도 공장을 짓던 중이어서 지붕도 없었죠. 눈비 맞으면서 한쪽에서는 공장을 짓고 한쪽에서는 생산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외환위기를 맞아 주물공장 대신 주조(다이캐스팅)공장이 팔렸고, 그는 만도 직원이 아니라 초국적기업 깁스의 직원이 됐다.

깁스는 회사를 인수한 뒤 2년 동안은 고용조건을 기존대로 유지한다는 계약조건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고용유지 계약기간이 끝나자 본색을 드러냈다. 2교대를 3교대로 전환하면서 공장을 24시간 풀가동하고,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만도기계 시절에는 기계가 금형에서 제품을 꺼내는 일을 했는데, 깁스는 이 기계를 치우고 사람이 제품을 꺼내도록 했다. 자동생산시 조형장치 제품의 생산속도가 65초당 한 개꼴이었는데, 수동으로 바뀌면서 33초당 한 개꼴로 두 배나 빨라졌다.

기계가 하던 위험한 업무를 사람이 대신 하다 보니 업무상재해가 잇따랐다. 화상과 골절·근골격계질환으로 지난해 산업재해율이 7.4%를 기록했다.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은 강원도에서 몇 안 되는 고용노동부 산재관리대상 사업장 중 하나다.

2006년 깁스차이나 가동 … '흑자 깁스코리아' 졸지에 적자행진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은 인수 2년 만인 2001년 11억8천만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2006년까지 줄줄이 흑자를 냈다. 2001년 383억원이었던 매출은 2005년 503억원으로 25%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잘나가던 깁스코리아는 2006년 깁스차이나가 중국 다롄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회사는 최근 경영설명회에서 지난해 한 해 동안 51억3천만원의 적자를 냈다고 밝혔다.

홍기상 금속노조 만도지부 깁스코리아지회장은 “현대자동차의 중국 진출 이후 1차 자동차부품업체들이 우후죽순 중국에 공장을 지었는데, 깁스도 6년 전 중국 다롄공장을 설립했다”며 “회사가 중국공장 안정화에 총력을 쏟으면서 깁스코리아에서도 중국에 인력을 파견하고, 기술력과 제품은 물론 금형까지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깁스차이나가 본격 가동에 들어간 후 내리막길을 걷던 깁스코리아는 지난해 주요 납품처인 한라공조와의 거래마저 중단했다. 홍 지회장은 “표면적으로 한라공조의 저가수주에 반발해 회사가 적자개선을 이유로 아이템을 반납한 것으로 비춰졌지만 그때부터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몰래 매각' 추진하다 들통 나니 폐업?

깁스는 비밀리에 회사 매각을 추진하다 노조에 덜미가 잡혔다. 지회가 지난해 11월 다른 루트를 통해 매각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회사는 갑을합섬(현 KB신세틱)과 매각협상을 상당부분 진전시켜 놓고 있었다.

지회가 매각사실에 대한 확인을 요구하자 스티브 제이 핸리 깁스코리아 대표이사는 그해 12월8일에서야 사실을 인정하고 뒤늦게 지회의 고용안정 장치 마련을 위한 보충교섭 요구에 응했다. 지회는 갑을합섬이 인수대상자로 적절하지 않다고 반발했지만 회사는 매각계약을 서둘렀다.

지회는 “모회사인 갑을그룹은 계열사 간 지급보증을 통해 소규모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규모를 확장해 가는 기업”이라며 “갑을합섬의 유동부채가 140억원에 달하고, 계열사 대부분의 재무구조가 불안정해 이들 중 한 곳이 부도가 나면 줄도산이 우려돼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지회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자 회사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보충교섭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달부터 아예 폐업 수순에 들어갔다. 홍 지회장은 “지회가 회사 매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인수 이후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구조조정과 기술이전료로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한 깁스와 한시라도 빨리 결별하고 싶을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지회는 만도가 깁스코리아를 재매각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입장이다. 공장 안에 위치한 공장이라는 지리적인 특성과 대부분 제품이 만도로 납품하는 구조적인 특성상 만도가 인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만도지부도 나섰다. 지부는 회사와 지난달부터 현재까지 네 차례 고용안정위원회를 열어 깁스코리아 재매각 안건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만도측은 인수할 뜻이 없어 보인다. 회사측은 만도지부와의 논의 과정에서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은) 이미 별도법인이므로 노사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홍 지회장은 “만도에서 깁스로 팔려가 보낸 지난 세월은 조합원에게 잃어버린 12년”이라며 “노동자에게 부실경영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넘겼던 한라그룹이 이제 사회적 책무를 다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뷰] "외국자본, 투기자본이나 생산자본이나 마찬가지"

홍기상
금속노조 만도지부 깁스코리아지회장

“외국자본은 투기자본이나 생산자본이 다를 게 없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똑같아요. 쌍용차를 보세요. 그리고 깁스코리아다이캐스팅을 보세요.”

홍기상(40·사진) 금속노조 만도지부 깁스코리아지회장은 “지난 12여년을 되돌아보면 혹독한 시간뿐”이라며 “회사가 빨리 매각되기를 원한다”고 강조했다. 깁스코리아지회에게 깁스는 빨리 헤어져야 할 대상이다.

“깁스가 들어온 이후로 노사관계가 좋았던 적이 없어요. 정상적인 영업활동이나 경영을 통해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데, 깁스 같은 외국자본은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으로 접근해요. 회사는 임금삭감과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노조는 이에 반발해 파업을 하는 상황이 매년 되풀이됐죠.”

지회가 가장 답답해하는 것은 깁스가 유한회사이다 보니 경영상태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회사가 적자를 핑계로 폐업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지회는 믿기 어렵다.

“회사가 로열티(기술이전료) 명목으로 매년 십수억원을 챙겨 갔어요. 그런데도 적자라고 말하면서 임금삭감 하고 이제는 폐업까지 하겠다고 합니다. 회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경영이 왜 부실해졌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요.”

홍 지회장은 깁스가 이미 투자한 자본 이상을 회수해 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회사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기술이전료 명목으로 미국 본사로 유입된 자금은 2003년 9억4천만원, 2004년 10억8천만원, 2005년 13억7천만원, 2006년 12억원이나 된다. 회사측은 깁스코리아가 적자를 기록한 2007년부터 기술이전료가 본사에 미지급됐다고 밝히고 있지만 지회는 30억원 정도가 이미 빠져나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회가 갑을그룹 계열사에 인수를 반대하고 나선 것은 지난 12년간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홍 지회장은 “부실자본인 갑을합섬이 회사를 인수한다면 깁스가 했듯이 구조조정이 반복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이 되풀이될 것”이라며 “만도지부와 함께 고통의 시간을 여기서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상자기사] "만도 먹고 튀어라"는 현재진행형
만도의 모태는 고 정주영 회장의 첫째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이 세운 현대양행이다. 국내 최초의 자동차부품회사로 출발해 80년 만도기계로 이름을 바꿨다. 한라그룹은 만도기계를 중심으로 2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서열 12위에 올랐다. 그러다 97년 외환위기로 흑자부도 사태를 맞았다. 만도기계는 결국 미국계 로스차일드펀드 주도하에 5개 회사로 쪼개져 팔렸다. 만도기계의 3개 섀시공장(평택·문막·익산)은 (주)만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미국 JP모건 계열사인 선세이지에 팔렸다. 이후 2008년 들어 한라그룹이 (주)만도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신세이지는 8년 동안 유상감자와 네 차례 배당으로 3천518억원을 회수했고, 264%의 투자자금 대비 수익률을 기록했다.

한편 위니아만도(아산)는 스위스계 UBS컨소시엄으로, 경북 경주의 자동차부품 공장은 프랑스계 발레오그룹에 넘어갔다. 충북 청원 자동차용 모터공장은 독일계 보쉬가 인수해 캄코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인수합병 시장에 매물로 나온 위니아만도 역시 UBS컨소시엄이 유상감자와 배당으로 2천억원을 챙겼다. 발레오공조는 발레오그룹의 철수로 2009년 공장 문을 닫았다. 노동계가 “IMF 외환위기로 국내에 들어온 외국계 자본들이 기업의 가치를 높여 이익을 챙기기보다 곳간에 쌓인 곡식만 빼먹고 빈 곳간 열쇠를 팔러다닌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외국자본의 "만도 먹고 튀어라"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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