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민주노총 미조직
비정규실장

해방 전후 북한과 한국 공산주의 역사를 전문으로 연구해 온 81살의 재미학자 이정식 교수가 최근 <박정희 평전>을 펴냈다. 우리에게 이정식 교수는 3권짜리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로 더 잘 알려졌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에 영문판으로 나온 이 책은 정파적 입장을 벗어나 엄정한 연구자의 자세로 해방정국의 우익과 좌익의 맨얼굴을 벗겨 냈다.

이정식 교수는 이 책을 다섯 달 전 92살의 나이로 숨진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캘리포니아대)와 공동으로 썼다. 스칼라피노 교수 역시 북한을 여섯 차례나 방문하는 등 남북관계를 실증적으로 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반세기 넘게 남북관계를 공부하면서 한승주 전 외무부장관과 이정식 교수 등 수많은 한국인 제자들을 배출했다.

스칼라피노의 제자 이정식 교수는 지난 31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서울로 피난와서 정착했기 때문에 해방정국의 북한 사회를 직접 겪었다. 스무 살의 이정식은 한국전쟁 중 미군장교와 선교사의 도움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로 유학갔다가 미국 펜실베니아대에 머물러 정치학 교수가 됐다. 이정식 교수는 74년 <김규식의 생애>와 88년 대담자료집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등을 썼다.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은 일본 땅을 밟은 적도 없으면서 <국화와 칼>을 썼던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와는 다른 종류의 학자다. 미국의 일본 점령교과서 역할을 하기 위해 급조해 만든 책 <국화와 칼>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그래서 86년 운동권 학생이던 한홍구(성공회대 교수)가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 때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를 한글로 번역해 우리 앞에 내놨다.

이정식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와 연결돼 있고,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신문기자를 지낸 놀라울 만큼 공통적 특징을 지녔다”고 분석했다. 참으로 냉철한 분석이다. 오른쪽의 이승만과 왼쪽의 박헌영이 이런 공통점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이 교수는 박헌영의 남로당계가 한국전쟁 이후 숙청되는 과정도 썼다. 그래서 다소 수준 이하였던 임화 같은 얼치기 사회주의자와 진짜 공산주의자 박헌영을 엄정하게 구별해 냈다. 그만큼 이 교수는 철저하게 자료에 근거해 역사를 조립해 왔다. 이 교수의 글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냉정하고 담담하다.

그런 이정식이 이번에 <박정희 평전>을 내놓자 조선일보는 지난 3일자 23면에 ‘그가 싫어 떠난 학자 그의 평전을 쓰다’라는 제목의 서평기사를 크게 실었다. 조선일보 기사의 ‘그’는 박정희다. 기사 첫 문장은 “박정희 치하에서 어용학자가 되기 싫어 미국으로 온 내가 그의 평전을 쓰다니 참 아이러니지요”라고 노학자의 직접화법을 소개했다.

참으로 조선일보다운 기사다. 이 짧은 인터뷰 기사 속에서도 이 교수는 “박정희의 근대화 성취는 높이 평가하지만 독재는 혐오한다”고 분명히 전제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제목부터 이 교수와 박정희의 악연을 떠올리게 편집했다. 젊은 날 박정희에 반대했던 노학자가 돌아온 탕아처럼 박정희 신봉자가 됐다는 교묘한 비틀기가 들어 있다. 그 박정희의 딸이 오는 대선의 유력주자다. 조선일보는 연말 대선을 앞두고 이 책이 나온 것에도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나 이 교수는 학자로서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나이 탓에 원고 마무리를 오래 끌다 보니 이 시점에 내놨을 뿐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출판시기 때문에 오해받더라도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이 교수는 자료에 근거해 연구해 온 학자다. 연구성과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개의치 않는다. 이 교수는 미 의회 청문회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하기도 했고, 육영수 여사 추도사를 미국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45년 15살의 이정식은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을 직접 겪었다. 한국전쟁 때는 매일같이 미국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서 살았다.

이 교수는 혁명가도 아니지만, 동시에 권력의 홍위병도 아니다. 우리 신문은 학자의 책 한 권도 자기가 추종하는 정파의 대선가도에 유리하도록 기사화하는, 철저히 훈련된 ‘문화권력’이 돼 버렸다. 조선일보 반대편에 있는 신문들도 열심히 이런 홍위병 역할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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