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법률원)

한 해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오가는 명산 설악산. 설악산을 오가는 관광객들 중 기암절경에 감탄하는 것을 넘어 산을 터전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관해 생각해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 글은 설악산의 그림자로 25년여의 시간을 견뎌 온 한 사람의 이야기다.

83년 정부는 우편법을 개정해 산간벽지·도서지역 등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 일반집배원과 구별되는 ‘도급집배원’이 집배·운송업무를 맡도록 하고, ‘도급집배원’에게는 ‘급여’가 아니라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정했다. 우편량이 많지 않은 벽지의 인건비를 줄이고자 만들어진 일종의 편법이었다.

그는 위와 같은 규정에 의해 87년 설악산의 도급집배원이 됐다. 젊은 시절 사업에 실패한 그는 삶에 염증을 느껴 설악산의 한 절에 들어가 짐을 옮기는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절의 주지스님이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일’이라며 설악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우편물을 받아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사명감으로 이를 수락했고 그 후 25년 동안 설악산 전 지역을 돌며 우편배달을 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매달 50만~75만원 사이의 수수료에 불과했다.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4대 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고, 다른 집배원들처럼 승진·승급의 혜택을 받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도 없었다.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부업을 하는 것도 금지당했다.

25년 동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지게를 지고, 험준한 산 속을 하루 40킬로미터 이상 이동하는 그를 사람들은 ‘설악산 우체부 아저씨’라며 신기해하며 찍어 갔고, 정부에서도 우리 사회의 귀감이라면서 표창을 내렸지만 그의 삶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최저임금 미만의 수입으로 사는 ‘비정규 노동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와중에 심장병을 얻은 아내는 변변한 치료를 받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나뿐인 자식 역시 돈이 없어 수의사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가 이러한 상황에 그저 순응했던 것만은 아니다. 우체국에 여러 차례 최저임금 이상의 급여를 지급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와 같은 요구가 묵살된 것은 물론 다른 직원들 역시 정당한 급여지급을 요구하는 그를 ‘왕따’ 취급했다. 처음에 그에게 도급집배원을 제의했던 절에서도 그가 급여인상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애국심이 없다’며 그를 나무랐다고 한다. 결국 그는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25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러던 그가 얼마 전에 국가를 상대로 임금 상당액의 소송을 제기했다. 퇴직을 단 두 달 앞두고 적어도 일반 집배원들의 급여만큼 받아 봤으면 하는 소원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 25년간을 때로는 사명감으로, 때로는 어쩌지 못해 견뎌 왔지만 한 번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이대로 퇴직을 한다면 지금까지의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소송을 제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그의 생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설악산의 명물로 소개하던 언론이 비로소 그의 힘들었던 삶을 다루기 시작했고,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우체국 사람들도 그에게 따뜻하게 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송을 취하하라고 간접적으로 종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이제 희망이 있다. 그가 25년 동안 일할 수 있던 단 하나의 이유였던 ‘사명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긴 것이다. 부디 25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줬던 ‘설악산 우체부 아저씨’, 아니 이제는 ‘설악산 우체부 할아버지’가 된 그의 작은 희망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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