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정기훈 기자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878미터의 봄'은 아래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출발한다.

복직을 위해 150일 넘게 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인 김철강에게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던 이는 다큐멘터리 PD인 기철이다. 김철강은 크레인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스마트폰을 이용해 트위터와 카카오톡으로 세상에 전달했다. 자동차 공장 안에서 두 달이 넘게 점거농성을 벌였던 노동자가 자신의 옥탑방에서 생수와 컵라면을 사다 놓은 채 불안에 떨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철강은 '반드시 살아서 크레인 위에서 내려가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기철은 이런 김철강의 투쟁을 3부작 다큐멘터리로 만들지만 외압에 의해 1편만 방영됐을 뿐이다. 방영 중단 이후 기철은 자신의 아버지가 묻힌,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선 정선 탄광촌으로 발길을 찾는다.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3월20일부터 4월8일까지 공연되는 '878미터의 봄'은 탄광촌을 배경으로 70~80년대를 살아갔던 우리 윗세대의 역사와 그 역사를 비켜 가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 세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작가 한현주(35·사진)는 탄광촌이란 과거를 크레인 농성이라는 현재의 모습에 투영시켜 이야기를 풀어간다. 때문에 한진중공업 농성과 쌍용자동차 농성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이 연극은 지독히도 현실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탄광촌이라는 특수한 공간의 이야기가 되면 연극이 아무래도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갖게 되죠. 878미터의 수직갱도를 앞에 두고 일어났던 과거의 일과 타워크레인이라는 수직적인 공간에서 발생하는 오늘의 모습은 시간을 넘어 같은 공간이고 같은 현실이 되는 겁니다."

막연하긴 하지만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꿈꾼 것이 대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조세희 선생의 '침묵의 뿌리'를 읽고 난 뒤였으니 연극으로 완성되기까지 15년이 걸린 셈이다. 이제껏 완성한 3편의 희곡 가운데 '878미터의 봄'이 가장 애착이 가는 이유도 "오래 준비했던 것을 마무리지었구나, 드디어 손을 털었구나"라는 강렬한 자기 안도감 때문이다.

작가 한현주가 완성한 3편의 희곡은 모두 무겁다. '우릴 봤을까?'는 죽음을 대하는 인간 군상을, '그 샘에 고인 말'은 철거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제 30대 중반이 된 생기발랄한 여성 작가가 걸어온 길로는 믿기지 않은 주제들이다. 한 작가 스스로도 "너무 짓눌려서 고민"이란다. 다음 작품으로 쌍용차 사태 이후의 모습을 담으려 했는데 이 주제 역시 너무 어두워서 선뜻 시작을 못하고 있다. 아예 다른 주제로 시선을 돌릴까 고민이 되는 정도라고.

항상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글로써 창조해 나가야 하는 작가는 자신이 만든 연극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1년에 한두 편 글을 쓰더라도 공연이 하나라도 만들어질지는 장담하지 못해요. 게다가 연극이란 것이 무대 위에서 2~3주 공연하고 나면 사실상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물어지는 구조를 가진 장르거든요. 무대가 끝나면 허탈감에 빠지곤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작가로 사는 것은 "완전히 비추"한단다. "전업작가로 못 먹고 살아요. 생활반경을 축소하고 소비를 줄이면서 근근이 살아간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작가가 알바를 하고 살거든요."

전업작가로는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재능이 있는 이들도 쉽게 성공하지 못하는 상황이 조성돼 있다고 한다.

"굉장히 빼어난 데뷔작을 올려놓고도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아요. 끝까지 버티는 사람들만 남아서 작품을 생산하는 현실이죠."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을 때까지는 쓸 것 같다"는 한현주 작가. "그동안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써서 힘들다"고 했으니 아마도 그의 다음 작품은 30대 중반이 표현할 수 있는 생기발랄한 코미디류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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