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정기훈 기자

“아이들은 책도 알록달록하고 예쁜 걸 좋아하잖아요. 노동법 교재도 예쁘게 만들어 주면 한 번이라도 더 펼쳐 보고, 궁금한 게 생기면 상담소로 전화도 걸어옵니다. 그런데 올해는 돈이 없어서 교재를 못 찍고 있어요. 노동법 내용은 매년 바뀌는데 옛날 책을 나눠 줄 수도 없고…. 예전 교재에서 바뀐 내용을 찾아 일일이 교정스티커를 붙이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어휴…. 엄두가 안 나서 요샌 A4 용지로 유인물을 만들어서 들고 다녀요.”

한국노총 경북구미노동교육상담소에서 일하는 이명진 부장의 말이다. 그는 구미·김천·영주·포항·울진·영덕 등 경북지역 실업계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학생들을 상대로 노동인권교육을 하고 있다. 최근엔 ‘교육 내용이 괜찮더라’는 입소문을 타고 교육을 요청해 오는 학교가 제법 늘었다. 문제는 돈이다. 지난해부터 교육사업에 지원되는 예산이 크게 줄면서 유류지원비 같은 실비도 나오지 않고 있다. 조만간 상담소 직원들의 급여지급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과연 이 부장은 학생들과 만나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최저임금 모르는 아이들 수두룩"

지난해 12월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일하던 고교실습생 김아무개군이 근로기준법의 허용범위를 넘겨 가며 장시간 근무하다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졌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뒤 취업을 앞둔 청소년을 대상으로 노동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답답하기만 하다. 잘 운영돼 온 교육프로그램마저 ‘돈 때문에’ 없애야 할 판이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과 19개 지역상담소가 진행해 온 ‘예비직장인 교육’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과 지역상담소는 지난해에만 전국 151개 학교를 찾아가 3만529명의 학생을 상대로 예비직장인 교육을 실시했다. 2004년 사업이 시작된 이래 최근 7년간 연평균 94개 학교를 방문해 1만9천401명의 학생을 만났다. 지역상담소 직원 35명과 한국노총 간부 15명 등 총 50명의 강사진이 실업계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인문계 고등학교와 전문대학까지 방문한다.

교육 내용은 △직장인 기본예절 △알바생을 위한 노동법 △일자리 구할 때 확인할 내용들 △일을 그만둘 때와 해고 △사업장 내 폭언·폭행 대처법 △성희롱 대처법 △현장실습 어떻게 할 것인가 △일과 건강 등으로 채워진다. 인터넷 홈페이지(albaedu.net)에 노동법 기초자료를 올려두고, 상담게시판을 이용해 온라인 상담도 받는다.

“학생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거요? 급여 떼였을 때 대처법이죠.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면서 필요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는 세상이지만,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모르는 학생이 수두룩합니다.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어떤 사장이 ‘최저임금 4천580원 중 4천원만 줄게. 우리 동네는 원래 그래’라고 하면 으레 그런가 보다 해요.”

성남노동교육상담소에서 일하는 이정익 부장은 "학교에서 아주 기본적인 노동교육조차 시키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종종 알바업체 사장들로부터 “뒤통수 조심하라”는 협박전화를 받는다. 노동교육을 받은 학생이 체불된 급여를 달라고 찾아가면, 해당 업체 사장은 대뜸 상담소로 전화를 걸어 따지기 시작한다. 대개 “(최저임금법 같은)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거나 “우리 동네 사장들이 정한 것보다 시급을 더 주면 내가 욕을 먹는다”는 식이다.

다행인 점은 수년째 성남지역 학교를 순회하며 교육을 벌인 결과 알바생 최저임금 시비가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을 받고 돌아간 학생의 형제·자매나 친구들이 알음알음 상담소를 방문하거나 문의전화를 걸어오는 경우도 늘었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서 상담소 직원들이 ‘해결사’ 역할을 똑똑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부장은 “노동부나 교육부가 발 벗고 나서서 해야 할 일을 우리 상담소 직원들이 나눠서 하고 있는데, 그나마 자꾸 예산이 줄어 걱정”이라며 “교육 다닐 때 교통비 부담이 너무 커서 소형차를 팔고 스쿠터를 살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국고지원 쥐락펴락하는 노동부

한국노총의 예비직장인 교육은 국고지원을 받아 이뤄진다. 국고보조금은 ‘노사관계 발전 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공모를 통해 선정된 노동단체나 노사관계비영리법인의 사업에 지원된다. 한국노총은 노동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중앙법률원의 상담·교육사업 △중앙연구원의 정책연구 사업 △중앙교육원의 노조간부 교육사업 △국제교류사업 등을 벌여 왔다.

그런데 지난해 한국노총은 전년(28억8천만원)보다 대폭 줄어든 16억원을 지원받았다. 정부의 노동단체 지원예산이 33억원에서 27억원으로 줄어든 데다, 지원단체가 12개에서 38개로 늘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으로 돌아갈 몫이 줄어든 것이다.

올해 국고지원 전망도 밝지 않다. 노동부는 현재 국고보조금 승인 여부를 심의 중인데, 한 번 줄어든 예산이 예년 수준으로 회복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최근 이채필 노동부장관이 한국노총의 정치방침을 문제 삼으며 ‘국고지원 중단’ 가능성을 언급한 터라, 한국노총 국고지원 사업 담당자들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과 지역상담소에 고용된 상담원들의 급여는 월평균 150만원 안팎이다. 벌써 4년째 급여가 동결됐고, 지난해 예산이 크게 줄면서 최근 몇 달은 차입을 통해 급여가 지급됐다. “임금이 체불되면 노동부에 신고하세요”라고 교육하러 다니는 이들이 정작 자신의 급여 문제로 노동부를 찾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노동인권교육의 싹, 예산 때문에 꺾여서야…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예비직장인 교육처럼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사업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노동인권교육의 싹이 잘려 나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민관을 포괄해 우리나라 노동인권교육의 토양은 척박하기 그지없다. 전교조 실업위원회나 인권단체들이 무료봉사 차원으로 교육을 벌이는 정도다. 최근 서울시과 경기도처럼 이른바 ‘진보 교육감’이 당선된 곳이나 ‘기아차 실습생 뇌사사건’이 발생한 광주 등에서 노동교육 매뉴얼을 만들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노동교육 직무연수가 시행되는 등 의미 있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지만, 이 역시 걸음마 수준이다. 전교조가 수년 전부터 추진해 온 ‘노동인권 교과서’ 개발사업도 흐지부지된 상태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의 지정희 국장은 “이미 사업 안착화 단계에 접어든 데다, 매년 수요가 늘고 있는 한국노총 예비직장인 교육이 예산의 벽에 막혀 중단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노동부 예산이 어렵다면 교육부 예산을 배정하는 방식으로라도 학생들을 상대로 한 노동교육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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