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인식의 본질적 괴리

▲ 김태욱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김춘수 시인이 쓴 ‘꽃’이라는 시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시구가 있다. 해석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시구를 볼 때면 사실 혹은 진실과 인식의 본질적 괴리를 느끼게 된다. 사물은 언어라는 인식의 도구로 포섭되지 않고서는 인식세계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언어가 사물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정 정도의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그만큼 정확한 언어사용이 중요하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소송에서의 사실과 인식의 괴리


이는 재판절차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판사는 당사자가 제출하는 증거에 의해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증거 없이 주장만 있는 서면에 의해 사실 인정이 이뤄지는 경우도 일부 있다. 적어도 사건에 대한 판사의 전반적인 인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사자주의라는 소송 일반의 특성상 소송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 위주로 주장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점이 있다. 원고와 피고 혹은 피고인과 검사가 가지는 언어(가치관)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사건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언어가 다르더라도 ‘언어’이기 위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공통점이 있다. 그 최소한의 공통점마저 없다면 ‘소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사실관계 재구성?

사용자 노동사건만을 수행하는 모 사무실의 광고를 우연히 보게 됐다. 자신들은 “탁월한 사실관계 재구성능력”이 있다는 광고였다.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사실과 인식의 괴리라는 문제와 의도적으로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다. 위 광고는 후자에 가까운 의미였다고 생각된다. 비단 이 광고를 낸 사무실뿐 아니라 소송에서 사용자들이 제출한 서면을 보면 지나치게 자기 위주로 사건을 재구성해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 그 재구성 정도가 지나쳐 정말 “말이 안 통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가 바로 ‘언어’로서의 최소한의 기본을 상실하고 ‘소리’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특히 해고사건의 경우 해고된 노동자에 대한 재판부의 인상을 좋지 않게 만들기 위해 ‘징계양정 참작사유’라는 미명하에 온갖 사유를 갖다 붙이는 경우가 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은 완전히 사라지고 “얼마나 나쁜 놈”인지를 그린 그림만 남게 된다.

새해에는 법률의 재구성!

이런 식의 사실관계 재구성과 의도적 왜곡에 대해서는 일일이 대응하는 것 자체가 참 괴롭다. 노동자측 사건만을 대리하는 법률원의 입장에서는 새해에는 여러 문제되는 법률들이 노동자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개정돼 위와 같은 방식의 사실관계 왜곡 시도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면 좋겠다. 새해에는 법률의 재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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