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주의자가 죽었다. 민청련 의장이라고 기억하는 민주당의 상임고문 김근태가 죽었다.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위해 싸우다 권력의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고문당했던 그의 발인이 오늘이다. 그래서 지금 이 나라 민주진보진영은 민주주의자가 죽었다고 조문이다. 민주진보진영은 초당적으로 계급 계층을 떠나 그의 죽음이 고문 후유증이라고 더욱 안타까워하고 있다. 지난해 12월30일 이미 이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 우리는 한 민주주의자를 이렇게 떠나보내고 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살해당한 자들을 수 없이 보았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뭐란 말인가. 도대체 뭐길래 그걸 외치면 고문이고 살해를 당한단 말인가.

2.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낭만이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이성을 잃게 된다. 이내 우리의 머리는 심장의 박동에 맞춰 돌아가 버린다. 질풍노도라는 단어는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투쟁을 감히 다 표현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심장를 뛰게 하고 우리의 머리를 미치게 만들었다. 4·19에서 5·18까지, 그리고 다시 6·10까지 이 나라의 거리로 달려나갔다. 이 나라의 광장에서 폭발했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이 나라의 신화가 됐다. 군사정권은 민주정권이 아니었으므로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를 쟁취해야 했다. 학살자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학살한 자가 민주를 말하게 둘 수는 없었다. 최류탄, 지랄탄을 뒤집어쓰고서도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쳐야 했다. 민주쟁취 앞에서는 폭력은 당연했고 평화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평화를 외쳐야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그래서 집회의 광장에서 시위의 거리에서 평화와 질서를 외쳐 댔지만 진압경찰에 맞서 보도블록을 깨서 던지고 화염병을 투척함에 주저함이 없었다. 민주주의 앞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길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6월의 거리에 시민을 불러냈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의 구호 속에서 최류탄과 화염병의 거리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러니 이 나라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노래하면 우리는 따라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민주주의자로서 김근태를 조문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민주당의 장관이었다는 게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라는 게 조문하고 말고를 따질 것도 없이 그는 민주주의자였으므로 민청련 의장이었으므로 모두가 추모한다. 노동자의 당의 간부도, 노동조합의 간부도, 노동자도 진심으로 머리를 숙여 애도한다. 이렇게 이 나라에선 각자 따로 돌던 머리는 민주주의 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노동자는 그저 머리를 숙이고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남긴 유지대로 민주통합당의 정권교체 민주쟁취를 따라 외쳐야 하는 것일까. 닥치고 한나라당정권 교체 민주쟁취라고 해야 할까.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엇이건대 노동자가 이래야 한다는 것인가.

3. 민주주의. 인민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주의를 말한다. 권력자가 제가 주인이라고 스스로 권력자가 되고, 권력자가 제멋대로 주인행세하며 권력을 휘두른다면 그 국가질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민이 선출하지 않은 최고권력자가 운영하는 국가권력을 독재정권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독재정권을 타도하겠다고 이 나라에서 수십년을 광장과 거리에서 민주시민이 돼서 독재정권에 맞서 싸워야 했다. 마침내 독재타도해서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됐다. 그리고 선출된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야당인사 출신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고 과거 독재정권의 당이 이어져 온 정당 소속이기도 했다. 전자에겐 독재정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후자를 민주정권이라고 부르는게 선뜻 내키지는 않았다. 민주정부라고 해서 권력이 작동하는 방향과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최고권력자를 국민이 투표해서 선출한다는 게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민주쟁취된 것이니 감히 민주쟁취하자고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이 나라에선 민주주의는 인민이 스스로 투표장에 가서 권력후보자에게 투표하는 것이 됐다. 민주주의의 의미가 바뀌었다. 왜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일까. 민주화운동이 우리를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라고 만들었다. 독재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인사의 구호를 따라 외치면서 배웠다. 민주쟁취는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거라고 노동자는 거리에서 민주투사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배웠다. 그러니 지금 이 나라에서 국민은 독재타도하자고 정권교체를 위해서 통합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과거 민주인사였던 야당인사의 발언에 잠시 어리둥절한다. 그러다 그들이 투쟁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친 자이므로 그들의 말을 따라 독재타도 정권교체를 따라하고 있다. 그리고 2012년 오늘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한나라당 정권교체 민주쟁취를 위해서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정권을 심판하자는 과거 민주투사였던 노조간부의 발언에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다 그들이 투쟁의 거리로 자신들을 몰고 나가서 민주주의를 외치라고 했던 자들이므로 그들의 말에 따라 외치고 있다. 아무도 묻지 않는다. 권력자가 아닌, 권력자가 되고자 할 수 없는 자, 그들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인민은 노동자는 민주주의를 그렇게 배웠으니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 외칠 뿐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민주화운동은 이 나라 인민에게 노동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기껏해야 최고권력자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에게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해 줬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인민에게서 노동자에게서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인민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세상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노동자가 스스로 주인이 되는 세상은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이렇게 인민의 것이 아니라고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고 선출된 권력자의 것이라고 권력자가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이 나라 민주화운동은 인민의 노동자의 머리에 새겨 놓았으니 그저 사전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교정한다고 해서 지울 수 없다.

4. 우리의 세상, 즉 자본주의국가법질서가 탄생할 당시부터 권력과 자본은 구분됐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권력의 공간에서만 작동하는 원리로 정의됐다. 자본의 공간, 즉 사업장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공간이 아니다. 수십년 광장과 거리를 헤매며 민주쟁취를 외쳤어도 인민은, 수백년 작업장에서 파업투쟁을 했어도 노동자는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소유권의 크기에 의해 권력의 크기가 정해진다. 소유권이 없는 노동자는 자본의 공간에서 주인일 수 없다. 아무리 노동을 해도, 그 노동의 크기가 아무리 크다 해도 노동과 자본은 구분되고 노동은 자본의 공간에선 주인일 수 없다. 이상한 것은 이 세상에선 노동운동조차도 사업장에서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업장은 자본과 노동의 공간인데 사람에 따라 작동하는 민주주의의 공간이어야 한다고 아무도 알고 있지 못하다. 실질적 민주주의니 뭐니에 관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그저 선출된 권력에 대한 것이고 자본의 공간에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용어가 아니다. 경제적 민주주의니 뭐니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경제적 불평등을 말하고 그걸 좀 시정하겠다고 하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거창한 민주주의인 양 포장하고 있는 그들의 언어일 뿐이다. 그러니 그래서 노동자는 민주쟁취가 자신의 상태를 개선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민주투사인 노동자대표 앞에서는 민주쟁취를 따라 외치지만 속으로는 그놈이 그놈이라고 할 뿐이다. 노동자는 누가 권력자가 되느냐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는다. 그놈이 그놈인데 목숨을 건다는 게 이상한 거다. 그러니 정권교체 민주쟁취를 위한 집회장에 불려나가서 대표가 선창하는 구호를 외칠 때에도 사업장에 돌아가서 사용자에 복종해서 일해야 하는 걸 걱정한다. 노동자에게 민주주의는 먼 그들의 언어일 뿐이다.

5. 우리는 이렇게 민주주의를 외쳐 왔다. 이렇게 민주를 쟁취했다. 인민에게서 민주주의를 빼앗고서 권력자를 선출하는 민주쟁취를 했다. 인민이 주인이 돼서 운영하는 민주주의는 쟁취하지 않았고 그건 민주쟁취에서 배제했다. 권력을 대표가 행사하는 대표주의가 감히 민주주의라고 불러 댔다. 입법·사법·행정의 고하를 불문하고 권력은 인민이 주인이 돼서 행사되지 않았다. 그래도 인민은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주인이 아닌 자가 주인행세하는 것이라고 노동자는 알아야 했다. 직접민주주의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인민이 주인이게끔 주인의 의사에 따라 모든 권력이 작동돼야 한다고 말하는 거다. 노동자의 의사가 대표의 의사가 되고 그것이 조직의 행위로 되도록 해야 한다. 사물을 개념에 포섭시키는 추상화 작업은 그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이 사소한 것이라도 포함되지 않도록 엄밀하게 가려서 진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포함된 것들이 그 개념 자체를 왜곡시켜 그 개념의 지향 자체가 왜곡되고 만다. 지금 세상은 민주주의에 대표주의를 포함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본래 지향은 사라져 버렸다. 대표주의가 민주주의인 것으로 갈음되고 말았다. 그러니 노조 등 노동운동단체조차도 대표주의가 판을 치고 그게 조합민주주의인 것인 양 선출된 대표의 행위가 노동자의 행위인 양 변질되고 말았다. 노동자는 없고 대표만 있는 세상이 됐다. 이런 마당에 앞에서 언급했던 자본의 공간에까지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게 무모해 보이기조차 하다. 민주주의자를 보내는 오늘, 우리는 우리가 외쳤던 민주주의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인민에게서 노동자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들의 꿈, 그들의 세상이 어떻게 빼앗기고 있는지 우리를 살펴야 한다.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자를 의심해야 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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