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법률원 법규차장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튼튼한 근육이나 날카로운 이빨 대신 1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뇌에 자신의 생존을 맡겼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매번 가능한 모든 정보를 파악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과거의 경험과 집단 속에서 학습한 상식 등을 토대로 간단한 몇 가지 정보만 가지고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에 옮긴다. 낯선 상황에서 새로운 존재와 맞닥뜨렸을 때 공격해야 할지, 방어해야 할지 또는 도망쳐야 하는지를 신속하게 판단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이 과제를 인간이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인지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의 키워드는 휴리스틱이다. 휴리스틱(heuristic)은 ‘발견하다’·‘찾아내다’는 뜻의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말인데, 경험과 상식 또는 주먹구구식 셈법에 의존한 즉흥적이고 단순한 추론을 뜻한다. 그러나 휴리스틱은 자주 오작동하기 일쑤여서 오해와 편견과 같은 부작용을 낳곤 한다. 게다가 그러한 오해와 편견이 집단 또는 이해와 결합되면 무서운 결과를 빚어낸다.

10년 전쯤 민주노총의 지역본부에서 조직담당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경찰로부터 출석요구서가 날아왔다. 워낙 경찰서 출입이 잦던 시절이라 또 집시법 위반 정도려니 생각하고 갔는데 웬걸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란다. 생판 모르는 이른바 듣보잡 어느 분께서 나에게 폭행을 당해 전치 8주의 부상을 입었다며 고소한 것이다. 당시 이랜드노조가 투쟁 중이었고 내가 담당이라 자주 집회 사회를 맡았었는데 사측 구사대 중 한 명이 찍어서 무고한 것이었다. 어처구니도 없고 황당해서 강하게 무죄를 주장했지만 경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도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부장검사까지 나서 “상대방이 무고한 게 맞는 것 같긴 하지만 민주노총이 주최한 집회에서 사람이 다쳤으니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며 그대로 기소했다. 심지어 나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조차 “변호사에겐 솔직하게 얘기하라”며 믿어 주지 않았다. 겨우 당일 촬영된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서 법원에 제출하고 두어 번의 거짓말 탐지기조사까지 받고 나서야 무죄를 인정받을수 있었다. 무죄를 선고했던 1심 판사는 판결을 낭독한 뒤 나에게 “법적으로는 무죄라 판단하지만 도덕적으로 당신은 유죄”라며 편견의 서슬 퍼런 칼날을 내 가슴에 서슴없이 쑤셔 박았다. “오죽하면 순진한 상인들이 무고까지 했겠냐”는 게 이유였다.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나의 변호사를 만나 자신은 100% 유죄를 확신한다며 “그자의 얼굴을 보면 범인임이 확실하다”며 항소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1천년 전에 사라진 줄 알았던 궁예의 관심법은 그렇게 권력의 뒤뜰에서 무성히 자라고 자라 내게까지 독기를 뿜어 댔다. 야간에 찍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비디오 테이프를 수십 번 돌려가며 겨우 확인한 증거가 없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범죄자가 됐을 것이다.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피의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유명한 법언은 그저 책에나 존재했다. 민주노총 상근자라는 직업과 얼굴, 이 두가지 정보만으로도 판사·검사·변호사 모두 내가 범인임을 확신했다. 이른바 ‘태도휴리스틱’이 작동한 것이다. 나로서는 들춰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그 두터운 육법전서에 통달한 분들이 그렇게 쉽게 허술한 편견에 갇혔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할 따름이다. 미국의 교육학자 로렌스 피터의 말처럼 “교육은 더 높은 수준의 편견을 얻는 방법”이기 때문인 것일까.

‘사고의 지름길’ 휴리스틱은 빠르고 편한 길이긴 하지만 종종 이렇게 자기 자신이나 상대방을 낭떠러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잘못된 휴리스틱 사용이 사회적으로 고착되면 편견이 되고 그 편견은 차별과 탄압의 날선 무기가 된다. 얼굴만 봐도 범인인지 아닌지 구분 가능한 능력자 검사들에게 노조 조합원이란 신분은 이미 범죄의 확실한 증거다. 무고를 당한 억울한 사람더러 “당신은 도덕적으로 유죄”라고 당당히 선고할 수 있는 판사들에게 파업은 무조건 처벌해야 마땅한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인류의 뇌는 아직 오류투성이 휴리스틱 수준밖에 진화하지 못했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는 1천년 전의 관심법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도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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