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1970년 8월9일 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70년 8월 스물두 살 전태일은 삼각산 기슭에 있던 임마뉴엘 수도원에서 기거하며 교회 신축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했다. 전태일은 여기서 4개월여 동안 지내며 망설이던 마음을 다잡아 죽음을 '결단'한 뒤 그해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불꽃 같이 남은 생의 두 달을 살다 11월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했다.

스무 살 박계현이 임마뉴엘 수도원을 찾아간 것은 78년이다. 제일교회 대학생부 형들과 함께 수련회에 갔다. 76년 열여덟 살의 나이에 상경해 중부시장 봉제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했던 박계현(53·사진)은 당시 2년 경력의 재단보조였다. 후일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이 된 박계현은 그때 '전태일 정신'을 만났다.


'전태일 정신' 만난 청년 박계현

박계현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래로 동생이 넷이었다. 집안의 기둥이 무너지자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됐다. 그도 다른 가난한 친구들처럼 서울행을 택했다. 기술을 배우면서 취직하기도 쉽다는 봉제공장을 찾았다. 장남 노릇에 아버지 노릇까지 하겠다는 생각으로 중부시장에서 열심히 일했다. 중부시장은 평화시장·통일상가와 함께 삼동으로 불렸다. 전태일이 바보회의 이름을 바꿔 만든 삼동친목회에서 삼동은 바로 3개 시장을 뜻한다.

그가 다니는 추리닝(운동복) 공장은 봄·가을로 성시였다. 추리닝은 ‘한쪽 팔뚝이 없어도 팔린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봄·가을에는 열심히 밤을 샜다. 야근수당을 받거나, 월급을 더 받지는 못했지만 신나게 일했다. 사장은 “고생한다”며 등 한 번 두드려 주고, 한 달에 딱 두 번인 휴일에 몇 푼 쥐어 주며 가끔 소주를 사 주는 것으로 보상했다. 전태일이 산화한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청계천 봉제공장은 변한 게 없었다.

재단보조 박계현은 전태일을 잘 알지 못했다. “공장에서 나이 먹은 선배들이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지나가며 가볍게 했던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전태일의 항거 뒤에 평화시장에서 생긴 청계피복노조도 중부시장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중부시장 인근 제일교회가 그에게 전태일을 가르쳐 줬다. ‘토큰’ 내고 버스를 타던 그가 학생들처럼 회수권 내고 버스를 타고 싶어 찾았던 교회였다. 대학생 친구들과 어울리던 그는 전태일 얘기를 들으러 창동을 자주 드나들었다. 이소선 어머니의 창동 집은 늘 20~30명의 노동자들로 붐볐다.

청계피복노조가 중부시장에 들어온 것은 그 즈음이다. 청계피복노조는 79년 유니온숍 조항을 담아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중부시장 노동자들도 노조에 가입했다. 박계현은 청계피복노조의 대의원이 됐다. 노조를 알게 되면서 느꼈던 기쁨은 잠시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80년 전두환 정권은 각계에 ‘정화조치 포고령’을 내렸다. 정화조치는 노조도 피하지 못했다. ‘정화’는 "노조를 해산하고 노조간부를 해임한다"는 다른 표현이었다. 전부터 눈엣가시였던 청계피복노조는 신군부의 타깃이었다. 포고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소선 어머니가 구속돼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청계피복노조 간부들도 같은해 12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무더기로 연행됐다.

이듬해인 81년 1월에는 노조에 강제해산명령이 떨어졌다. 서울시장 명의로 온 강제해산명령 공문에는 ‘노동조합법 제32조에 의거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즉시 해산을 명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동조합법 32조는 "행정관청은 노동조합이 노동관계법령에 위반하거나 공익을 해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노동위원회의 의결을 얻어 그 해산을 명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5·18 민중항쟁 후 첫 저항 ‘아프리’ 사건

조합원들은 저항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생각이 미친 곳은 외국기관이었다. 부당함을 알릴 수 있고, 정부 당국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선택된 곳은 서울 강남구 서초동에 있던 외국기관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아프리)였다. 아프리는 미국노총이 아시아 후진국 노조를 지원하는 기구였다. 청계피복노조도 노동교실 기자재를 지원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마침 80년 1월30일 아프리 본부장인 모리스 파라디노씨가 일본에서 열린 국제노동연맹 아시아지역기구 연사로 참석했다가 한국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노조는 거사를 준비했다. 아프리 한국사무소에서 이 외국인을 붙잡고 농성을 벌일 계획이었다. 일단 노조가 요구한 면담은 성사됐다. 그러나 아프리 한국사무소에는 당초 면담을 약속했던 모리스 본부장이 없었다. 결국 당시 한국사무소장이던 조지 커틴이 역할을 대신했다.

“당시 전두환이 대통령 되기 전에 미국 대통령 레이건을 만나러 미국에 갔을 때입니다. 미국은 자국 국민의 인질사건에 민감하잖아요. 우리나라 신문에는 5단짜리 기사도 안 났는데, 미국신문에서는 대문짝만 하게 나왔다고 해요. 몇 시간 동안 농성을 하는데 경찰들이 벽을 뚫고 들어와서 우리를 체포했습니다. 석유 뿌리고 죽겠다고, 죽을 각오로 했죠. 당시 5·18 바로 뒤라 모든 운동세력이 숨죽인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아프리 사건이 가장 먼저 터진 겁니다.” 박계현 사무총장의 회고다.

청년 박계현은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먼저 출소한 이소선 어머니가 지금은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구명을 요청했다. 전두환 정권은 “미국 가서 누구 때문에 고생했는데…”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박계현 사무총장은 “구속 뒤 전태일을 제대로 알았다”고 말했다. 그리곤 노동운동가가 됐다.

출소한 뒤에는 노조재건운동에 힘을 쏟았다. 청계피복노조는 해산된 뒤 청계모임이라는 친목회 형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83년부터 양심수를 석방하는 등 철권통치에서 유화정책으로 돌아섰다. 84년 4월8일 청계피복노조 복구대회가 명동성당에서 개최됐다. 사무실도 구하고 집행부 진용도 짰다. 박계현은 조직부장이 됐다. 정부가 노조로 인정하든 안 하든, 설립신고증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박계현 사무총장은 “지금의 청년유니온 같았다”고 말했다.


암울한 시절 운동의 중심 청계피복노조

 

▲ 정기훈 기자

그러나 노조에 대한 정부 탄압은 거셌다. 경찰은 불법노조라는 이유를 댔고 간부들은 입건됐다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노조를 인정하라는 집회와 시위도 거듭됐다. 청계피복노조는 노조운동의 핵심이 됐다. 노동자가 사망한 곳에는 반드시 청계피복노조가 있었다. 85년 구로동맹파업에도 관여했다.

“전태일 분신을 계기로 생긴 노조 아닙니까. 분신사건이 난다든지, 노동자가 사망하면 가장 먼저 뛰어갔습니다. 시신을 경찰에 빼앗길까 봐 그랬죠.”

박계현이 두 번째 구속된 것도 이 때문이다. 86년 3월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씨가 분신한 사건이었는데, 성명서를 읽었다는 이유로 집회시위 주동자가 돼 버렸다.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그는 다시 87년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소 노동자 이석규씨의 장례식에 참가했다가 다시 수배를 당했다.

수배생활 동안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집안사정은 엉망이 됐다. 처가에 신세를 지게 되자 부부 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졌다. 노조 내부에서는 조직의 운동노선을 놓고 반목이 일었다. 비판과 반비판, 비난과 반비난이 이어졌다. 결국 그는 수배생활이 끝나자 노조활동을 접었다. 재봉틀을 사서 아내와 봉제일을 했다. 그는 여전히 재단사였고, 아내는 특급 미싱사였다. 그러다 2007년 전태일재단(옛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내의 허락도 받아 냈다.

“아내가 그때 운동을 그만두게 해서 미안했다며 하고 싶으면 하라더군요.” 그의 얼굴에서 고마움과 더불어 생계를 다시 아내에게 맡긴 미안함이 묻어났다.


“감옥 갈 각오로 싸워라”

돌아온 그는 이소선 어머니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이소선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생계를 포기한 덕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어머니께 미안하다고 했다.

“실은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어머님은 1~2차 희망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제가 말렸어요. 그때마다 비가 내려 걱정이 돼서요. 쓰러지시기 전에 백기완 선생하고 한 점심약속도 비 때문에 못하게 했어요.”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재단 운영위원회가 ‘3차 희망버스는 전태일과 함께’라는 슬로건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버스를 대절해 내려가겠다는 결정을 내리던 날 쓰러졌다. 어머니가 희망버스에 그토록 오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 총장은 “어머니께서는 굳은 결의와 각오를 보인 김진숙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는 노동자들이 하나 돼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평소에 모든 노동자가 감옥 갈 각오를 하고, 나도 감옥을 가겠다는 정신을 가지면 못 이룰 게 뭐냐는 말씀을 자주하셨다”고 덧붙였다.

“씨앗을 뿌린 게 전태일 동지였다면 이런 것을 거둬들이는 역할을 한 분은 어머니죠. 어머니는 청계피복노조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컸던 분이고, 노동자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많았던 분입니다. 서민들에 대한 애환을 잘 아는 분이기도 하고…. 그런 고달픈 삶을 달래고, 그런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 만들어지길 기대하고, 그런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살았던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어른 한 분을 잃은 거죠.”

어머니는 지난달 7일 아들 전태일 옆에 누웠다. 그의 묘비에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쳐 싸우세요’라고 새겨졌다. 박 총장이 전한 이소선 어머니의 말이다. “이 땅의 옷도, 자동차도, 배도 노동자가 만든 것인데 노동자들이 하나 돼 싸우지 못해서 권리를 제대로 못 찾고 있으니까 하나 돼 싸워 나가길 바란다, 이것이 태일이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던 지난 18일 창신동 골목은 봉제공장에 원단을 나르는 오토바이 반, 사람 반이었다. 박 총장은 창신동에만 봉제공장이 3천곳을 넘는다고 했다. 저임금에 4대 보험도 적용받지 못하고 장시간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다고 했다. 전태일재단은 전태일 열사 41주기를 앞두고 ‘전태일 운동’을 제안할 예정이다. 전태일과 어머니의 정신을 기억하며 비정규직·이주노동·장애노동·청년과 연대하고, 노동이 당당한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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