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불과 2주 전 모든 언론이 정권 말기의 도가 넘치는 공기업 낙하산 인사를 비판했다. 그럼 뭐하나.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은 보건복지부 차관에 또 영일만 친구를 내정했다.

청와대 최장기 참모가 내곡동 사저 문제로 옷을 벗은 다음날인 지난 18일 청와대 행정관이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원내대책회의장에 들어가 회의내용을 문자질하다 들켰다. 최고의 쟁점인 한미FTA 관련 회의라서 의욕이 과해 사고를 쳤다지만 수습 과정은 형편없다.

민주당은 ‘경악할 야당 사찰’이라고 흥분했다. 당사자는 ‘관행’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민주당이 불편하게 느낀다면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물러섰다. 도둑질하다 들켜 놓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MB정권 이후의 MB가 걱정이다.

한겨레신문은 19일 8면 전면에 걸쳐 월가 시위를 다룬 시리즈기사를 싣고, 그 제목을 <시위대 전원에 발언권…‘전면 개방정치’ 실험>이라고 달았다. 무슨 대단한 일처럼 시위대 실무그룹이 16일 미국 교원노조가 시위대에게 제공한 창고 한편에서 전략회의를 하는 장면으로 사진을 4단 크기로 곁들였다. 이 기사는 미국 뉴욕과 벨기에 브뤼셀과 한국을 연결하는 글로벌 취재였다. 특파원도 밥값은 해야 하니까.

내가 본 희망버스 회의는 매번 이들보다 몇 배나 더 치열했지만 난 거기서 한겨레를 본 적이 없다. 대신 이달 7일 밤과 8일 새벽으로 이어진 밤 사이 한진중공업 취재에서 한겨레가 보여 줬던 모습은 오랫동안 잊지 못하리라.

늘 새로운 팩트를 찾는 기자들은 사회의제화된 노사분쟁이 장기화되면 지친다. 일상이 된 팽팽한 노사의 대치상황에서 매일 새로운 게 나올 리 만무하다. 그래서 하나라도 새로운 게 있으면 키우기 바쁘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키워야 산다. 그 취재의 결과가 현장에 어떤 파국을 나을지 생각지 않는다. 거기에 약간의 불순한 편집국의 정치적 복선까지 결합하면, 초를 친 기사는 고립돼 싸우는 노동자들을 짓밟고 사태를 종결짓고 만다.

94년 전지협-전기협 공동파업 때도 그랬고, 95년 한국통신 파업 때도 그랬다. 99년 서울지하철 파업 때도, 2002년 발전파업 때도 그랬다. 언론은 늘 막바지에 와선 거간꾼처럼 다가와 “이제 그만하면 됐다. 이쯤에서 정리하시라”고 권한다. 이런 거간꾼 역할은 전적으로 조·중·동의 몫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한겨레가 딱 그 방식대로 움직였다. 그 결과가 8일자 7판에 턱걸이하듯 겨우 걸친 원고 3매짜리 1면 톱기사다. ‘1년 뒤 재고용’이 뭘 의미하는지, 94명의 해고자와 희망버스에 탔던 수많은 국민들이 뭘 염원했는지는 흔적도 없다.

권고안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나왔는지 주의 깊게 살피지도 않았다. 차라리 ‘노조 정리해고 수용’, ‘노조 백기투항’이란 제목으로 제대로 싸우지 못한 노동자들을 나무라는 게 더 나았다.

나는 한겨레 기자가 특종이라며 촌각을 곧추세우며 자판을 두들기던 그 밤 그 시각 영도조선소 앞 노숙농성장에서 핏발 선 해고자들과 마주앉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허탈해하는 분노가 왜 한겨레로 향해야 하는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광부 양창선씨가 67년 9월6일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 갱도에 매몰돼 16일 만에 구조될 때에도 우리 언론은 하루 전날 ‘극적 구조’라고 기사를 써 댔다. 언론은 구조순간을 TV와 라디오로 생중계했다. 양씨가 구조 직후 구조대원들에게 말했다는 “수고 많았습니다”는 일간지 사회면 제목으로 박혔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다. 16일 동안 어둠에 갇혀 있던 양씨는 눈도 못 뜬 채 담요에 실려 나갔다. 말을 할 상황은 애초부터 아니었다. 작문하는 기자들이 “참 수고가 많다.”

양씨는 최악의 부정선거로 궁지에 몰린 박정희 정권에게 구세주였다. 이렇게 우리 언론사는 선무당의 특종 욕심에 제물이 돼 죽어 간 약자들의 역사다.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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