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너무 빨리 평온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사태의 심각성과 원인을 얘기했는데, 국민들의 뇌리 속에서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지난 10일 오전 서울 삼성동 전력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김주영(50·사진) 위원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장기계는 멈췄고, 사람들은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수술 중이던 병원의 전기도 나갔다. 지식경제부에 접수된 피해건수만 8천962건, 피해금액은 610억원에 달했다. 9·15 정전사태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다됐다. 당시 초유의 정전사태에 피해상황과 원인·대책 등을 놓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다.

국무총리실이 발표한 정전사태의 원인에는 전력산업 구조문제에 대한 언급이 쏙 빠졌다.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소속 의원들까지 한목소리로 “전력계통 운영은 전력거래소에서 하고, 소유는 한전이 하는 바람에 정전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는데도 말이다. 더구나 한국전력 분할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던 전문가가 ‘전력위기 대응체계 개선 태스크포스’의 책임자가 됐다.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다.

김 위원장은 정전사태가 전력산업 구조 정상화의 계기가 되기를 잠시나마 바랐다. 그러나 기대는 다시 실망으로 바뀌었다.

“정전사태 재발 개연성이 여전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라는 게 터무니가 없어요. 한전의 분할 민영화를 주장했던 사람이 TFT에 들어갔으니 결론은 불을 보듯 뻔한 거 아닙니까.”


분할이냐 통합이냐 …“전력산업 중요한 시기”

98년부터 시작돼 전력산업을 뒤흔들었던 전력산업 구조개편은 지난해 중단됐다. 구조개편의 근거였던 ‘전력산업 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의 시효가 만료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전에서 발전부문이 떨어져 나갔고, 전력계통의 운영권은 전력거래소로 넘어갔다.

지난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정부가 의뢰한 용역보고서를 통해 판매부문을 한전에서 분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전력거래소의 전력계통운영 부문을 다시 한전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논란 끝에 정부는 KDI가 제시한 것을 장기적 과제로 삼기로 했다. 대신 전력의 생산부터 판매까지의 과정을 발전사·전력거래소·한국전력이 나눠서 하는 현행 분할방식을 당분간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전력노조 입장에서는 판매부문 분할이 중단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반면에 전력거래소의 계통운영 부문을 가져오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다행스러움과 아쉬움의 한숨만 내쉬고 있기에는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둘러싼 정세가 너무 급박하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판단이다. 
 

 정기훈 기자

최근 국회 지식경제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전력 수용예측과 사용량을 결정하는 계통운영 부문을 전력거래소에서 떼어내 한국전력으로 이관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제 2의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놓고 분할주의자와 통합주의자들이 한판 충돌을 예고하고 있다.

전력계통 운영의 원상복귀를 주장해 온 전력노조에게는 ‘위기이자 기회’가 온 셈이다. 김 위원장은 “한전으로서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가 찾아왔다”고 했다.

일부 정치인들이 노조와 같은 목소리를 낸다지만,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우리나라의 정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다. 한나라당이 되든, 민주당이 되든 전력산업 분할과 민영화의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 돌이켜보면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처음 시작한 정권은 지금의 민주당이었다.

김 위원장은 “누가 (대통령이) 되던 간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분할 민영화 계획을) 던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빠르게 변하는 전력산업, 예측 불가”

그런 가운데 분할이냐, 통합이냐로 나뉘었던 기존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논쟁을 뛰어넘는 문제가 최근 전력산업에서 대두되고 있다. 이른바‘스마트 그리드’(지능형 전력망)라는 복병이다. 전력회사의 통합제어 센터와 발전소·송전탑·전주·가전제품 등에 설치된 센서가 실시간 정보를 교환하면서 전력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이다.

예컨대 전력요금이 비싼 낮에는 냉방을 자제하고, 요금이 저렴한 밤에는 세탁기를 돌리는 것이다. 각 가정과 기업의 전력수요를 빨리 예측할 수 있어 전기사용량의 10% 이상을 절감할 수 있고, 지구 온난화 완화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위원장은 그러나 “(스마트 그리드가) 보기 좋게 포장만 돼 오히려 민간 발전사업자들과 대기업들만 배불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어떤 시민들이 밤에 자다가 일어나서 세탁기를 돌리고, 다리미질을 할까요. 기업은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밤에 공장을 돌려야 하는데, 그러면 연장근무 수당 등으로 인건비도 대폭 올라갑니다. 그 자체가 허구입니다.”

스마트 그리드 시스템 확대를 위해 대형 통신업체들이 통신 분야뿐 아니라 전기 판매사업에도 뛰어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우리나라 통신업체 등에서 이런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김 위원장은 “극소수이지만 민간 발전사들이 출현한 상태에서 스마트 그리드 시스템 확대는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모른다”며 “민간 발전사들이 늘어나면 결국은 서민가정과 농가의 전기공급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전력위기 대응체계 개선 태스크포스의 단장을 맡고 있는 이승훈 명예교수가 스마트 그리드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이 느끼는 위기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전력노동계, 사회적 책임 다할 때”

김 위원장은 최근 전력산업 상황을 “혼돈의 시기”라고 표현했다. 2002년 전력노조 위원장에 당선된 뒤 10년 가까이 전력산업 구조개편과 싸웠기에 이제는 마침표를 찍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2000년대 초반 분할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전력산업 구조개편에 반발해 함께 싸웠던 전력 노동계는 뿔뿔이 흩어졌다. 지난해 KDI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연구용역 결과를 놓고 전력노조와 발전노조·한국수력원자력노조가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이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도 했다.

“노동계에 새로운 과제가 던져졌어요. 이미 전력산업에 민간사업자들이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스마트 그리드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겁니다. 전력산업 구조개편에 맞서 함께 싸웠던 초심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김 위원장은 “전력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노조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라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